찬바람과 함께 산이 붉어지자 사람들의 발길이 부쩍 잦아졌다. 서울 도심과 가까워 늘 붐비는 곳인데 단풍객들까지 가세해서 요즘 더 소란스럽다. 내가 머물고 있는 이곳 불암사(佛巖寺)는 한여름에도 절 입구의 제월루(霽月樓)에 앉아 있으면 시원한 바람이 등줄기를 스치는 곳이다.
얼마 전에는 가을 산사(山寺)음악회를 열어 등산객에게 '음성 공양(供養)'을 베풀었다. 사람들은 흥에 겨워 어깨를 들썩이며 추임새를 넣고, 무대 앞으로 나와 신나게 몸을 흔들면서 가을 밤을 즐겼다. 그다지 넉넉지 않은 산사 처지에 인기 절정의 요즘 스타는 엄두도 못 내고 왕년(往年)의 별들만 모셨는데, 불암산에 한 번 더 오른 것 같은 땀을 흠뻑 쏟으며 노는 등산객들을 보니 한없이 기쁘고 고마웠다. 정성 들여 밥을 지은 주부는 가족이 둥글게 앉아 맛나게 밥공기를 싹 비울 때 가장 보람을 느낀다는데, 꼭 그런 심정이었다.
절은 시주를 받기도 하지만 베풀기도 한다. 돌이켜 보면 나는 두 번이나 절집에서 식사 준비를 책임지는 공양주(供養主)로 살았다. 나는 1959년 열세 살의 어린 나이에 해인사로 입산했다. 입산하면 행자(行者) 생활부터 시작한다. 행자는 정식 스님도, 민간인도 아닌 요즘 말로 치면 '인턴 스님' 신분이다. 힘든 행자 생활 중에서도 가장 고된 것은 새벽에 일어나 밥 짓는 일이었다.
대중(大衆)이 250명 정도 되는 해인사는 한국에서 스님이 가장 많은 사찰이다. 아침 공양 시간은 보통 5시 30분쯤인데 밥을 지어내려면 행자는 새벽 3시 이전에 일어나야 한다. 공양주의 총괄 지휘 아래 쌀 담당인 미감(米監), 채소 담당인 채공(菜供), 국 담당인 갱두(羹頭), 반찬 담당인 원두(園頭) 등이 각자 역할을 맡아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절에서 국과 반찬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가장 신경을 기울이는 것은 밥이다. 그래서 초짜 행자는 가장 간단한 채소 다듬는 일부터 시작해서 점차 국과 밥으로 임무가 '승격'된다. 밥은 불 조절과 뜸 들이는 시간에 달려 있다. 그런데 전날 온 종일 고된 일을 하고 이튿날 새벽에 일어나 불 앞에 앉으면 자기도 모르게 깜빡 졸다 뜸 들일 시간을 놓친다. 그런 날이면 공양간은 줄초상이 나고 중생 구제의 장대한 꿈을 갖고 출가한 장부(丈夫)는 솥을 타고 내리는 밥물처럼 눈물만 하염없이 짓게 된다.
아침마다 눈물 흘리는 가운데서도 인자한 큰스님들 덕분에 고된 산사 생활을 견뎌낼 수 있었다. 특히 평생을 해인사에서 수행하셨고 훗날 주지도 지내신 지월(指月·1911~ 1973) 스님은 우리처럼 어린 행자들도 늘 '보살'이라며 높여 부르셨다. 밥을 되게 지으면 "밥이 꼬들꼬들 참 맛있습니다" 하시고, 밥이 질면 "밥이 촉촉해서 맛있습니다"라며 실수를 눈감아 주셨다.
죽을 고비도 넘겼다. 당시 해인사 가마솥 뚜껑은 나무였다. 국·밥·물을 끓이는 아궁이 세 개가 나란히 놓였는데 국을 저으려면 옆의 물 끓이는 아궁이 위에 올라가야 했다. 그날도 국을 젓는 데 힘을 주다 보니 솥뚜껑이 열린 사실을 몰랐다. 몸을 조금만 뒤로 옮기면 바로 펄펄 끓는 물속으로 떨어질 찰나였다. 눈 깜짝할 사이에 생사(生死)의 순간이 오갔다. 그 일 이후 더욱 조심했는데 결국 사달이 났다. 뜨거운 국을 들고 들어가다가 문지방에 걸려 넘어진 것이다. 넘어지면서 국을 쏟지 않으려고 끝까지 잡고 있었던 것이 화근이었다. 뜨거운 국물이 팔 위로 쏟아져 화상을 입고 말았다. 지금도 왼쪽 팔뚝에는 그 상처가 남아 있다.
고된 공양간 생활은 5년이 넘어서야 끝났다. 그 뒤 정식으로 계(戒)를 받은 뒤 해인사 강원(講院)을 마치고 대학에서 불교학을 공부했다. 승려생활 20년에다 대학까지 졸업했으니 모두 서울에서 일하라고 했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부처님과 스님들의 은혜를 갚고 싶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정식 스님이 되고 나면 두 번 다시 맡지 않는 공양주였다. 그것도 육군사관학교 훈련보다 더 힘들다는 해인사 공양간이었다. 그 일은 마치 군대 두 번 가는 것이나 다름없는 '미친 짓'이었으니 주변에서 극구 말린 것은 당연했다.
공양주 소임은 여전히 힘들었다. 20년이 지나도 부엌은 그대로였는데 쌀이 달라져 있었다. 그때 한창 나오던 통일벼는 물 맞추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처음 한 번은 죽이 되고 두 번째는 탄 밥이 됐다. 강원 9기 후배인 교무스님으로부터 야단을 맞았다. 얼마나 호통이 심했던지 내가 한참 선배라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지만 끝까지 참고 머리를 숙였다. 무엇이든 스님들 잘 모시는 일이면 하고 싶어 틈이 나면 강원 스님들 공부하는 데 가서 몰래 고무신을 닦았다. 공양주로 다시 한철 지내고 나자 이제야 비로소 수행자가 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출가 50년이 넘도록 나를 지탱한 힘은 참선도 경전도 아니라 대중 250명을 위해 밥 짓고 국 끓이던 공양간에서 나왔다. 대각(大覺)을 이룬 부처님도 베풀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눈이 먼 제자를 위해 수행자 800명이 바느질을 하자 부처님도 거들었다. 민망해진 제자들이 만류하자 부처님은 "나 역시 공덕 쌓기를 원한다"고 말씀하셨다. 하물며 우리 같은 중생들이야 베푸는 데 주저함이 있어서야 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