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보통 아는 '추사' '완당' 같은 김정희(1786~1856) 선생의 명호(名號) 즉 이름과 호를 포함한 칭호가 몇 개나 될 것 같습니까? 무려 343개입니다. 제가 조사한 바로는 세계 최다입니다. 김정희 선생이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지어 사용하면서 세상과 소통한 수단이 바로 명호였습니다."
국내외 공개된 추사 김정희의 명호 343개 전체를 840쪽으로 정리·분류하고 뜻을 풀이한 방대한 연구서 '추사, 명호처럼 살다'(아미재)를 출간한 이는 최준호(55·사진) 도립전라남도옥과미술관 관장. 최 관장은 홍익대 동양화과를 나와 국립대만사범대학 미술대학원에서 전각학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받은 전문가다. 그는 추사가 평생에 걸쳐 쓴 문서와 편지, 인장(印章), 탁본 등에 서명한 명호와 말미구(末尾句)를 탐정처럼 추적했다. 당초 추사의 인장 연구서를 준비하다가 '도대체 추사의 명호는 몇 개나 될까' 궁금해 빠진 '옆길'에서 무려 6년을 머문 것이다.
최 관장의 안내를 따라가면 간단하게는 동생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형(兄)'이라고만 쓴 경우를 비롯해 '우인여묵중제노완시안(又因餘墨重題老阮試眼·또한 먹이 남은 이유로 거듭 글을 쓰면서 늙은 완당은 눈을 시험해 봅니다)'까지 다양한 '김정희'를 만날 수 있다. 가령 '추사(秋史)'라는 호는 김정희가 부친을 따라 사신 일행으로 청나라에 가기 직전인 1809년 가을부터 사용했다는 것이 최 관장의 해석. 그전에 '현란(玄蘭)'이란 호를 쓰던 김정희는 중국 방문을 앞두고 새로운 각오를 담아 '추사'로 바꿨다. '보담재' '완당'처럼 옹방강과 완원 등 중국 스승을 존경해 붙인 것, '동해(東海)' '천동(天東)' '계림(鷄林)' 등 조선 출신의 자부심을 드러낸 것도 있다. 제주도 유배 중엔 '수많은 갈매기 주인(三十六鷗主人)'이 등장하고, 한강변에서 농어회와 국수를 먹은 후엔 '국수 먹는 사람(�p麵·담면)'이라 썼다. 늘그막에 과천 살 때는 '병든 과천 사람(病果·병과)', 수염 많은 자신을 가리켜 '염옹(髥翁)'이라고도 썼다.
당대 최고의 금석학(金石學) 대가답게 김정희는 옛 글자를 명호에 쓰면서 '이 글자는 모르겠지?'라며 수수께끼를 내기도 했다는 게 최 관장의 설명. 과오(果 )의 '오'자는 강희자전에도 나오지 않아 최 관장이 4년을 고민한 글자. '과천 집' 혹은 '과천 집에 사는 자신'을 가리킨 것으로 해석했다. '륵( )'자도 마찬가지. 이 글자는 김정희가 귀양살이나 병들었을 때처럼 어려운 상황에서 '돌에 글씨를 새기듯 적었다'는 의미로 주로 사용했다. 요컨대 "김정희는 명호와 말미구를 통해 자신의 실력을 과시하고, 상대를 교육하고, 세상을 조롱하며, 쓰라린 심정과 상황을 에둘러 표현한 것"이라는 게 그의 말이다.
최 관장은 "앞으로는 당초 계획했던 추사의 인장을 정리할 계획"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