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흔한 책이 아니다. 독자의 선택을 받았다가 퇴짜 맞은 책이다. 바꿔 말하면 '반품(返品) 도서'인데, 그래서 궁금하다. 주인님이 왜 나를 망망대해 서점으로 돌려보냈는지. "주문을 잘못했다"는 말은 얼마나 진실일까? "마음이 바뀌었다"는 고백을 믿어야 하나? 나는 그것이 궁금하다.
서울 수송동 교보문고 고객센터에서 상담원이 전화를 받는다.
"고객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실수로 책을 잘못 주문했습니다. 반품하고 싶어요."
전형적인 레퍼토리다. 상담원은 책을 사용한 적이 없는지, 반품이 가능한 품목인지 묻는다. 수험서, 여행서, 사진집이나 비닐포장이 뜯긴 도서는 돌려받지 않는다. 구매한 지 스무날이 지나도 반품 불가다. 파본이 아니라면 우송료는 고객이 부담한다. 본지는 교보문고와 예스24에 의뢰해 올해 독자가 구매했다가 반품한 책의 통계를 구했다. 베스트셀러 순위는 실시간으로 관리되지만 '반품 목록'을 뽑는 데는 시간이 좀 걸렸다.
◇베스트셀러가 반품도 많다
'많이 팔린 책이 반품도 많을 것'이라는 예측이 상식적이다. 실제 조사된 반품 통계는 거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표 참조〉
먼저 교보문고. 올 들어 지난 23일까지 반품이 가장 많은 책은 혜민 스님의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었다. 2600권이 서점으로 되돌아왔다. 하지만 이 에세이는 여기서만 무려 20만 권이 팔렸고 반품률 1.3%로 보면 평균치와 같았다. 작년 교보에서 독자의 반품은 온·오프라인을 합쳐 약 20만 권(80억원어치)으로, 총매출의 1.3%다.
교보의 반품 리스트에서 영어학습서를 삭제하면 또 이런 책들이 남는다. 정목 스님의 '달팽이가 느려도 늦지 않다'(1200권 반품), 드라마의 원작인 '해를 품은 달'(1·2권 합쳐 1310권), '시골의사 박경철의 자기혁명'(650권), 더글러스 케네디의 소설 '빅 픽처'(400권), 김정운 교수의 '남자의 물건'(400권), 월터 아이작슨의 '스티브 잡스'(350권),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350권), 이병률의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300권), 김난도 교수의 '천 번을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300권)…. 베스트셀러가 반품 상위권을 차지한 것이다.
예스24도 사정은 비슷했다. 올 들어 9월까지 반품 순위는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달팽이가 느려도 늦지 않다' '안철수의 생각' '어떻게 원하는 것을 얻는가' '아프니까 청춘이다' '해를 품은 달' '하루 15분 정리의 힘' 등으로 베스트셀러 목록과 닮아 있었다. 단 반품률은 교보에 비해 낮았다. "온라인 서점이라서 책을 더 신중하게 고르고, 반품으로 물게 되는 배송료도 저항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설명이다.
◇반품 독자들은 말한다
대한민국 서점에서 판매됐다가 반품되는 책은 연간 100만 권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연평균 한 권도 안 되는 성인 독서량을 감안하면 충격적인 수치다.
교보문고는 반품 사유를 자료로 축적하고 있었다. 지난 1~7월 온라인에서 책을 샀다가 반품한 독자들은 질문지에 이렇게 답했다. "주문을 잘못했습니다"(46%) "마음이 바뀌었어요"(34%) "파본(破本)이 배달됐습니다"(7%) "집에 같은 책이 있더라고요"(5%)…. 〈그래픽 참조〉
'주문 착오'나 '변심(變心)'이 반품의 8할을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진실은 아무도 모른다. 귀찮아서 '주문 착오' 항목을 선택하거나 둘러대는 핑계일 수도 있다. 교보 고객센터의 계영선 팀장은 "편견이나 선입견을 가지고 고객을 대하지는 않는다"면서 "'주문 착오'나 '변심'도 다른 조건에 문제가 없다면 반품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관련 통계가 없는 예스24의 추측은 좀 다르다. 예스24 마케팅본부는 "쓱쓱 읽히는 가벼운 책, 혹은 예상보다 어려운 책이라서 반품하는 경우도 꽤 있을 것"이라며 "소장 가치가 작거나 '다 안 읽어도 되겠다' 싶은 책이 정리 1순위인 셈"이라고 했다.
◇블랙컨슈머가 늘어난다
반품, 배송 지연 등 불편사항을 처리하는 교보 고객센터에서는 상담원 30명이 비수기에는 하루 3000통, 성수기엔 하루 6000통의 전화를 받는다. 뜻밖에 소란하지는 않았다. 상담원 김모씨는 "겉으론 평온하지만 속은 어수선한 '감정 노동'"이라면서 "30~40대 고객은 그래도 나은데 20대 여성은 까다롭다"고 말했다.
독자가 반품한 책은 파주 물류센터로 온다. 도서 상태를 살펴 양호하면 다시 유통(도장 자국은 아세톤으로 지운다)하고 파손된 책은 출판사로 보낸다. 교보 물류센터 김순미 차장은 "베스트셀러를 선물용으로 대량 구매했다가 반품하는 사람이 많아진 것 같다"면서 "박스째 들어오는 경우도 가끔 있다"고 했다.
정신적 보상까지 요구하는 '블랙컨슈머(black consumer·악덕 소비자)'도 늘어나는 추세다. 현재 교보의 블랙 리스트에 오른 독자는 약 1000명. 15년 경력의 김순미 차장은 "상습적으로 반품하는 분, 책 하나하나에 에어백을 싸달라는 분, 초인종을 몇 번 이상 누르지 말라는 분 등 형태는 다양하다"면서 "나를 포함해 상당수 직원이 혈압약을 복용한다"고 말했다.
◇베스트셀러란 무엇인가
베스트셀러에는 시대와 욕망이 반영된다. 독자가 산 베스트셀러 가운데 1~2%가 반품된다는 사실만으로 대중적인 책의 가치를 깎아내릴 수는 없다. 하지만 베스트셀러를 바라보는 시선은 달라지고 있다.
한 인문서 출판사 대표는 "과거에는 독자들 사이에서 충분히 평가전을 치르며 베스트셀러가 됐지만 요즘엔 마케팅과 서점의 선택이 더 중요해졌다"고 잘라 말했다. 즉 '검증되지 않은 베스트셀러'가 종종 만들어진다는 주장이다. 그는 "베스트셀러의 품질이 떨어지면서 소장 가치도 잃어가고 있다"고 진단했다.
황상민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는 '베스트셀러 반품'의 까닭을 한국인의 심리에서 찾았다. "대세를 따르고 싶어 앞다퉈 베스트셀러를 손에 넣지만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황 교수는 "잠시나마 소유하고 읽었다는 데 만족할 뿐"이라면서 "베스트셀러조차 사실상 '일회용 소비재'가 된 셈이고, 시대정신은 TV 오락프로그램에서 찾아야 할 판"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