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인하거나 혹은 화려하거나.'
올가을·겨울 패션 트렌드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 발목 언저리까지 치렁치렁 내려오는 검은색 롱코트, 어깨에 각이 잡힌 제복 느낌의 재킷으로 무장한 여전사들이 거리를 활보하는가 하면 한편에선 만화 '베르사유의 장미'를 연상시키는 금실 자수 문양에 주름 장식이 잔뜩 잡힌 옷을 화사하게 차려입은 요조숙녀들이 여성미를 뽐낸다.
패션업계는 올 하반기 트렌드가 극단적인 양상을 보이는 것에 대해 "장기불황과 팍팍한 현실 속에서 여성도 남성적인 강인함을 추구하려는 심리, 반대로 불황일수록 마음속으로는 더욱 화려하고 사치스러움을 갈망하게 되는 심리가 함께 표현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한층 부드러워진 밀리터리 룩
이른바 워커 구두, 카키색 야상, 어깨심이 들어간 재킷 등 군복을 연상시키는 밀리터리 룩은 지난해에 이어 올가을에도 변함없이 인기를 누릴 전망이다.
올해는 터프한 밀리터리 스타일이 다소 부드러워졌다. ‘드리스 반 노튼’은 눈부신 금빛 자수로, ‘메종 마틴 마르지엘라’는 반짝이는 금빛 버튼으로 화려함을 더해 밀리터리 룩이 주는 엄숙함을 살짝 누그러뜨렸다. ‘도나 카란’은 선홍색 밀리터리 재킷으로 밀리터리 룩에 여성성을 한껏 살렸다.
올가을 밀리터리 룩의 또 다른 특징은 2012 가을·겨울 패션쇼 런웨이를 강타한 ‘러시안풍(風)’이다. ‘발망’의 가을·겨울 라인은 19세기 러시아 차르 황실 보물인 ‘파베르제(Faberge)의 달걀’을 연상시키는 격자무늬, 러시아 전통 나무인형 ‘마트로시카’를 닮은 화려한 색감이 시선을 잡아끈다. 발망의 신세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올리비에 루스테잉(Rousteing)은 “뉴욕 옥션 크리스티 전시에 소개됐던 제정 러시아 시대 보석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말했다. ‘니나리치’는 영화 ‘닥터 지바고’를 통해 익숙해진 귀족적 러시아 의상과 밀리터리 룩을 절충했다.
LG패션의 여성복 브랜드 ‘모그’는 밀리터리 룩의 인기를 반영해 야상 점퍼 비중을 전년 대비 10%가량 늘리고, 군복 무늬 프린트를 넣은 블라우스와 티셔츠를 새롭게 출시했다.
◇화려함의 극치, 바로크 스타일
‘일그러진 진주’라는 뜻을 지닌 포르투갈어 ‘바로코(Barroco)’에서 유래한 바로크 스타일은 균형과 조화를 추구한 르네상스 스타일과 비교하면 화려하다 못해 호사스럽다. 패션계에서는 바로크 스타일을 ‘부푼 소매, 화려한 장식, 허리를 잘록하게 강조한 X자 실루엣’이라고 정의한다.
‘돌체 앤 가바나’는 이런 바로크 스타일을 유감없이 표현했다. 화려한 금·은빛 자수 무늬, 꽃문양이 크게 들어간 하늘하늘한 검은색 시스루(안이 비쳐 보이는) 원피스는 사치 금지령이 내려질 정도로 호사스러움을 추구했던 바로크 시대로 잠깐 되돌아간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눈이 시릴 만큼 짙푸른 로열 블루 셔츠에 정교한 문양을 가미해 실용적인 바로크 스타일을 제시한 ‘스텔라 매카트니’, 알이 굵은 주얼리와 섬세한 레이스를 대비시켜 21세기식 바로크 스타일을 선보인 ‘랑방’도 화려한 면에선 결코 뒤지지 않는다.
‘모스키노’는 반투명한 검은 원단 미니 원피스에 금빛 자수로 포인트를 주거나 의상에 사랑스러운 꽃 장식을 더해 바로크 스타일을 충실하게 따르면서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낭만적 바로크 스타일을 추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신사의 취향은 ‘버건디 컬러’
올가을·겨울 남성복엔 신사의 품격을 강조하는 고풍스러운 느낌의 롱코트와 정장 수트가 대거 등장했다. 불황으로 인한 불안감 때문에 멋을 아는 댄디한 남성보다는 신뢰할 수 있는 듬직한 남성의 느낌이 드는 스타일이 인기를 얻게 됐다는 분석이다.
색상 역시 신뢰성을 주는 색상이 인기가 높다. 삼성패션연구소 노영주 연구원은 “클래식하고 실용적인 그레이와 네이비가 남성 정장의 핵심 컬러가 됐다”고 말했다. 네이비는 전통적으로 신뢰감을 줄 수 있는 색상으로 여겨져 면접 의상으로 많이 쓰인다. 그레이와 네이비, 두 가지 색상을 바탕으로 레드·퍼플·블루·그린 등의 밝은 색상이 포인트 컬러로 많이 활용될 것으로 보인다. 제일모직은 “레드 계열 중에서 특히 진한 레드와인 빛을 내는 버건디(짙은 와인색)는 이번 시즌 단연 돋보이는 포인트 컬러가 될 것”이라며 “버건디 색상의 스웨이드 옥스퍼드화로 가을 느낌을 더해보는 것도 좋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