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산 오막집에 추위가 스며들자/ 사방 이웃들이 막걸리 잔을 건네네/ 나무꾼에 고기잡이까지 기쁘게 친구가 되니/ 집마다 마음껏 웃음꽃 피었구나'.

'천주학쟁이'로 몰려 절해고도(絶海孤島)에서 기약 없는 유배 생활을 하는 신세였지만 한양 선비는 섬사람과 어울려 막걸리 잔을 나누며 한시(漢詩)를 주고받았다. 16년간의 흑산도 유배 중 생을 마감한 비운의 조선 실학자 손관(巽館) 정약전(丁若銓·1758~1816)의 시문집(詩文集)이 처음 발견됐다. 연세대 학술정보원은 올해 다산 정약용 탄신 250주년을 맞아 전시회를 앞두고 소장해 오던 '여유당집' 필사본을 정리하던 중 정약전의 시문 40여 편이 실린 것을 발견, 28일 본지에 공개했다.

김영원 연세대 국학자료실 팀장이 손가락으로 짚은 부분에 ‘이하 손관(以下 巽館)’이라고 적혔다. 손관은 ‘손암(巽庵)’과 함께 정약전의 호로 쓰였다.

정약전이 흑산도에서 쓴 국내 최초 수산학 저서인 '자산어보(玆山魚譜)'와 조정의 소나무 정책을 비판한 '송정사의(松政私議)'등의 저술은 전해져 왔지만 시문이 발견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허경진 연세대 국문학과 교수는 "'자산어보'가 어부들과 함께 쓴 물고기 생태학 보고서이고, '송정사의'가 나무꾼 입장에서 제출한 정책 건의문이라면, 이번 시집은 그 어부와 나무꾼들과 주고받은 흑산도 16년의 시적(詩的) 자서전"이라고 평했다.

학술정보원의 김영원 국학자료실 팀장은 "여유당집 필사본의 일부로 봐온 '잡고(雜藁)'라는 표지의 책 속에서 시 제목 아래에 '이하 손관(以下 巽館)'이라고 적힌 걸 발견했다. 손관은 '손암(巽庵)'과 함께 쓰인 정약전의 호인데 글씨가 작아 지금껏 지나쳤던 것"이라고 했다. 안대회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는 "정약전은 뛰어난 학자여서 시문학 작품도 있을 걸로 짐작했지만 전해진 게 없어 아쉬웠다. 학계로서는 큰 수확"이라고 했다.

정약전은 정조 때 병조좌랑 등을 지냈으나 천주교에 입교한 후 이승훈과 더불어 포교 활동에 가담했다. 정씨 형제를 아꼈던 정조가 죽고 순조 1년(1801년) 신유박해에 연루돼 다산은 강진으로, 정약전은 흑산도로 각각 유배됐다. 정약용이 강진에서 '목민심서' 등을 집필하는 동안, 정약전은 흑산도 연안 어류를 관찰·기록한 '자산어보'를 남겼다.

이번에 발견된 시들은 현지 어부·나무꾼과 어울리며 시를 주고받았던 정약전의 소탈한 모습을 보여준다. '자산어보' 집필에 큰 도움을 준 어부였던 장창대(張昌大)에게 준 시(寄張昌大)에선 '사람들은 장창대를/ 남들보다 뛰어난 선비라 하지/ 낡은 책을 언제나 손에 들고/ 오묘한 도가 마음에서 떠나지 않네(寄張昌大 人說張昌大 迢迢逸士林. 古書恒在手 妙道不離心)…'라고 읊었다. 동생 정약용의 시에 운(韻)을 따서 쓴 답시도 있다.

연세대 학술정보원은 10월 2일 포럼 '다산 정약용 관련 문헌의 재조명'에서 새로 발견된 정약전 시문 40여 편에 대한 발표회를 열고, 이날부터 다음 달 30일까지 '다산 탄신 250주년 기념 전시회'도 개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