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남부 지역 일대에서 귀가 중인 여성 7명을 연쇄 성폭행한 혐의로 21일 기소된 '남부 발바리' 이모(35)씨는 경찰 조사에서 "여성 10명을 성폭행했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피해자 중 경찰에 신고한 여성은 4명뿐이었다. 경찰은 이씨의 진술을 토대로 탐문 수사를 해서 피해 여성 3명을 더 찾아냈지만, 결국 나머지 범행 혐의 3건은 기소장에서 빠질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성범죄는 범인이 자백해도 처벌받지 않을 구멍이 있다. 우리나라 형법은 19세 이상 성인을 대상으로 한 성범죄를 친고죄(親告罪)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친고죄는 피해자가 신고·고소하지 않으면 수사할 수 없고, 고소했다가도 가해자와 합의해 고소를 취소해도 처벌할 수 없다. 이 친고죄 규정 때문에 대다수 성범죄는 법적 처벌을 피하고 범죄 통계에도 잡히지 않는, 이른바 '숨은 범죄(暗數犯罪·hidden crime)'화(化)하고 있다.

2010년 6월 15일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에서 현장검증을 실시하는 초등학생 성폭행범 김수철. 그는 2006년에도 인터넷 채팅으로 만난 15세 청소년을 성추행했지만, 피해자 가족과 합의가 이뤄져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다.

2010년 여성가족부 조사 결과 성폭행이나 성폭행 미수 사건 피해자의 신고율은 12.3%로 나타났다. 피해를 봐도 신고조차 하지 않기 때문에 성범죄자 8명 중 7명은 아무 처벌도 받지 않고 거리를 활보하는 셈이다.

2008년 경기도 안산에서 붙잡힌 '안산 발바리' 손모(39)씨는 경찰에 여성 24명을 성폭행했다고 진술했지만, 그중 경찰에 신고한 여성은 2명뿐이었다. 경찰이 탐문을 통해 피해자 11명을 더 찾아냈지만, 결국 나머지 피해자 11명은 찾지 못해 혐의 중 절반이 '숨은 범죄'가 됐다.

신고나 고소를 통해 수사를 받더라도 실제 재판을 받는 비율도 낮다. 2010년 성폭행 범죄 불기소 처분 비율은 49.4%로 살인(23.7%)이나 강도(38.9%)보다 훨씬 높다. 성폭행범을 불기소 처분한 이유 중 66.1%가 피해자가 합의해줬기 때문이었다.

2010년 초등생을 성폭행해 중상을 입힌 김수철은 이전에도 인터넷 채팅으로 만난 15세 청소년을 성추행한 일이 있었으나 피해자가 합의해줘서 아무 처벌도 받지 않았다.

성범죄를 친고죄로 규정하는 것은 수사나 재판 과정에서 피해 사실이 알려지면서 피해자가 2차 피해를 보는 것을 막기 위한 목적이다. 또 친고죄가 폐지되면 가해자와 합의가 어려워져서 피해자가 보상을 받기 어렵게 된다는 점도 있다.

하지만 친고죄 규정이 성범죄 피해자가 아니라 오히려 성범죄자를 보호하는 제도로 변질했다는 비판이 나온다. 한국성폭력상담소 김두나 상담가는 "친고죄 도입 취지가 피해자 사생활 보호를 위한 것인데 실제로는 오히려 가해자의 사생활을 보호하는 제도가 돼버렸다"며 "친고죄가 '성폭행을 하면 인생 망친다'는 인식이 아니라 '성폭행해도 합의하면 그만'이라는 인식을 부추기는 셈"이라고 말했다.

이런 비판 때문에 8세 여아를 무참히 성폭행한 이른바 '조두순 사건'과 장애인 상대 성폭행범이 가벼운 처벌만 받은 이른바 '도가니 사건'을 계기로 2010년부터 미성년자, 작년부터는 장애인 대상 성범죄자에 대해서는 친고죄가 폐지됐다.

외국에서는 성범죄를 친고죄로 규정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미국·영국·독일·프랑스 등 서구권 국가뿐 아니라 중국·대만·이집트 등에서도 성범죄는 친고죄가 아니다. 법무부 관계자는 "일본과 우리나라를 제외하면 성범죄자에 대해 친고죄를 택하는 나라는 거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친고죄를 폐지하면 피해자가 합의를 통해 보상받기 어려워진다는 주장도 비판 대상이다. 스웨덴은 1982년 성범죄에 대한 친고죄 규정을 폐지했는데, 이때 성폭력 피해자가 가해자뿐만 아니라 관련 보험이나 범죄 피해자 보상 제도 등을 통해 다각도로 배상 및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보완책을 마련했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윤정숙 연구위원은 "피해자와 합의하고 보상했다는 이유로 범죄자를 처벌하지 않는 것은 '돈으로 범죄를 무마한다'는 발상이나 마찬가지"라며 "처벌은 처벌대로 확실하게 하고, 보상은 보상대로 제대로 해야 '숨은 성범죄자'가 줄어들 것"이라고 말했다.

☞친고죄(親告罪)

피해자가 고소해야만 가해자를 처벌할 수 있는 범죄이다. 우리 형법상 성인 상대 강간·강제추행죄, 간통죄, 모욕죄 등이 친고죄로 규정돼 있다. 친고죄는 피해자의 고소가 수사의 개시 요건이 되며, 법원은 1심 선고 전까지 고소가 취소되면 공소기각(처벌 불가) 결정을 내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