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팬픽(fanfic) 전성기'다. 팬픽은 '팬(fan)'과 '픽션(fiction)'의 합성어로 '특정 인물 또는 작품의 팬에 의해 탄생한 2차 창작물'을 통칭하는 용어. 한때 '음지 문화' '그들만의 리그'로 영원히 남을 것 같았던 팬픽은 올 들어 명실상부한 대중문화의 주류로 떠올랐다. 전 세계를 통틀어 3000만 부가 팔려나간 소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원제 'Fifty Shades of Grey')의 작가 E.L.제임스(49)는 영화 '트와일라잇'(2008)의 팬픽을 각색한 이 작품으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일부 마니아층 사이에서 단연 '올해 최고의 발견'으로 꼽히는 케이블TV 드라마 '응답하라 1997'(tvN)의 주인공 역시 당대 아이돌 그룹 H.O.T의 팬픽을 쓰다 동국대 문예창작학과에 진학하는 부산 여고생이다. 일부에선 팬픽을 가리켜 '저급 문화일 뿐'이라고 폄하한다. 하지만 팬픽 집필 경력을 살려 내로라하는 대학 진학에 성공한 '문학소녀' 3인의 생각은 좀 달랐다.
◇내 글 기다리는 사람도 있다니… 희열 '짜릿'
이승희(한국예술종합학교 극작과 3년)씨는 온 나라가 축구에 미쳐 있던 지난 2002년, 남과는 좀 다른 방식으로 그 열기를 즐겼다. 당시 초등 6년생이었던 그는 우연히 축구선수 팬픽 전용 인터넷 커뮤니티를 알게 된 후 홍명보·황선홍 선수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글을 써 올렸다. "그때만 해도 댓글과 비슷한 개념의 '감상밥'이란 게 있었어요. 인기 많은 팬픽 작가는 '밥'을 많이 받았죠.(웃음) 어느 날, 제게도 '다음 편이 얼른 나왔으면 좋겠다'는 감상밥이 온 거예요. 당시 느낀 희열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어요."
그는 고교 진학 후에는 교내 연극반에 들어가 극본을 쓰며 창작 활동을 이어갔다. 친구와 함께 쓴 극본을 극화해 무대에 올렸을 땐 일종의 '전율'이 느껴졌다. 극작 전공을 결심한 것도 그 즈음이었다. 그는 "극작으로 대학에 오기까지 (실존 인물에 내 나름의 상상력을 더해 이야기를 만든) 팬픽 습작 경험 덕을 많이 봤다"고 말했다. "돌이켜보면 제가 처음 남에게 보여준 창작물이 팬픽이었어요. 어쩌면 그때 받은 긍정적 반응이 지금의 절 만든 셈이죠."
◇팬픽 습작 경험, 문예창작과 진학에 큰 도움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1학년 동기인 고민지(가명)씨와 박유진(가명)씨는 각각 아이돌 가수를 주인공으로 한 팬픽으로 습작 활동을 시작했다. 고씨는 초등 6학년 때 같은 반 친구가 재밌다며 보내준 동방신기 팬픽을 읽고 '나도 쓸 수 있겠다' 싶어 덤벼든 경우. 이전까지만 해도 한 가지 일에 좀체 집중하지 못하던 그는 금세 친구들의 대필 의뢰에 시달릴 정도로 글쓰기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한편, 소녀시대를 좋아했던 박씨는 고교생 때부터 소녀시대 멤버 태연과 티파니가 등장하는 로맨스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한창 땐 두 달 만에 중편소설(원고지 500매) 이상 분량의 스토리를 '뚝딱' 완성하기도 했다.
실제로는 별다른 연결고리가 없는 인물 혹은 캐릭터 간 관계에 상상력을 불어넣다 보니 팬픽의 줄거리는 대개 '동성 간 연애'가 주축을 이룬다. 고교 시절, 서울예대가 주최하는 '동량청소년종합예술제'(이하 '동량') 백일장에서 상을 타기도 했던 고씨의 당시 수상작 역시 동성애를 다룬 소설이었다. (실기시험 위주로 신입생을 뽑는 서울예대에서 동량 입상 경험은 입학 보장 수표나 다름없는 역할을 한다.) 그는 "어릴 때부터 팬픽에서 (동성애를) 접하다 보니 편견을 가질 겨를조차 없었다"며 "동성애를 주제로 글을 쓴 참가자가 나뿐이었는데, 그 점이 오히려 심사위원 사이에서 높은 점수를 받은 것 같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모두 "팬픽 집필 경험이 문예창작과 진학에 도움이 됐다"고 입을 모았다. 고씨는 "우리 학과는 실기시험을 볼 때 단어 사용에 절제를 요구한다"며 "그러려면 읽는 이의 감정을 미리 계산해야 하는데, 그 작업을 하는 데 팬픽 습작만큼 좋은 게 없다"고 말했다. "감정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단어는 사용하면 안 되는데 독자에겐 슬픈 감정을 전달해주고 싶을 수 있잖아요. 그럴 때마다 '어떤 단어로 문장을 만들면 사람들이 내 의도를 받아들일까?' 스스로 질문한 후 그 대답을 팬픽으로 실험하곤 했어요. 글쓰기 과외를 할 때도 학생한테 '기회 닿는 대로 팬픽 많이 써보라'고 권합니다." 박씨 역시 "팬픽의 최대 장점은 '내가 쓰고 싶어 쓴 글'인 만큼 고민도, 끈기도 듬뿍 담겨 있다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전문가 진단|'팬픽 권하는 사회' 이면엔…
시인 겸 문학평론가인 맹문재(47) 안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최근 국내에서 불고 있는 팬픽 열풍의 원인을 "성(性)에 대한 여성의 욕구 분출"에서 찾았다. "인터넷의 발달로 정보 접근권이 확대되면서 여성도 남성 못지않게 성에 대한 욕구가 커졌습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여전히 그런 세태를 쉬쉬하며 인정하지 않고 있죠. 그 결과, 억눌린 욕구가 (성 묘사에 개방적인) 팬픽에 대한 열광으로 표출되는 겁니다." (실제로 해외에서 '다빈치 코드'나 '해리 포터' 시리즈보다 빨리 팔려나가는 '그레이의…'가 우리나라에선 일찌감치 청소년 유해간행물로 판정돼 '빨간 딱지'가 붙여졌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이 소설의 국내 구매자 중 70%는 여성으로 집계됐다.)
맹 교수는 "팬픽 독자는 단순히 '작품을 읽는 이'가 아니라 경우에 따라 '작가 이상'의 역할을 해내는 존재"라고 규정했다. 숱한 팬픽 중 하나에 그칠 뻔했던 '그레이의…'가 독자의 열광적 호응을 등에 업고 어엿한 단행본 시리즈로 재탄생한 사례가 그 사실을 입증한다. "앞으로는 문학계에서도 독자의 기대와 참여가 작품 생산의 핵심 요소로 떠오를 겁니다. 그런 측면에서 팬픽의 미래는 지금보다 밝을 거예요. 팬픽 소비야말로 청소년이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가장 적극적으로 인식하려는 행위니까요. 지금이라도 문학에 뜻을 품은 청소년이라면 팬픽 창작에 도전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