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덕 감독 '피에타'의 한 장면. 갑작스럽게 '엄마'라며 나타난 여성(조민수)은 혼자살던 을씨년스런 강도(이정진)의 공간에 들어와 뜨개질을 하고 밥을 차려준다.악마같은 행동만하던 강도의 마음에 변화가 일기 시작한다.

베니스 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이라는 쾌거를 이룩한 김기덕 감독의 ‘피에타(Pieta)’에는 충격적인 스토리를 더욱 특별하게 각인시켜 주는 황량한 공간이 눈에 들어옵니다. 영화의 배경인 서울 청계천 주변의 철공소 밀집 지역입니다. 쇠를 깎고 자르고 구멍 뚫고 용접하며 여러 가지 물건을 만드는 수많은 소규모 자영업자들이 ○○정공 ○○공업사 등의 간판을 걸고 일하는 곳입니다. 올망졸망한 철공소들이 다닥다닥 붙은 이곳은 무슨 ‘철공소단지’라고 부르기보다는 ‘철공소마을’이란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곳입니다.

이곳저곳에서 선반·밀링 등 공작기계 돌아가는 소리 요란하고, 철 냄새, 기름 냄새가 풍기는 곳. 산업 구조의 변화에 따라 일은 점점 줄어들어 많은 자영업자와 철공 노동자들의 주름도 깊어가는 곳입니다. 낮에도 불을 켜지 않으면 컴컴한 청계천 철공소 내부는 영화 ‘피에타’에서 처참하고 고통스러운 상황이 벌어지는 공간이 됩니다. 못 받은 돈 받아내는 게 직업인 사내, 강도(이정진)가 주로 찾아가는 채무자들이 이 철공소 주인 혹은 노동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김기덕 감독 '피에타'의 한 장면. 끔찍한 방법으로 채무자들에게 돈을 받아내던 남자 강도(이정진)에게 어느날 자신의 엄마임을 자처하는 여자(조민수)가 불쑥 찾아 와 " 널 버린 걸 용서해달라"고 무릎을 꿇는다.

악랄한 사내가 채무자들을 ‘인간 백정’처럼 위협하는 대목마다, 좁디좁고 어두컴컴한 철공소는 지옥같이 끔찍한 취조실이자 고문실이 됩니다. 강도는 쇠에 구멍 내던 공작기계로 채무자의 몸에 구멍을 내거나 다리를 부러뜨리는 일도 서슴지 않습니다. 그 결과로 받아낸 상해보험금으로 빚을 갚게 하려는 것이죠. 강판 절단기에 손목을 스스로 올려놓는 채무자도 있습니다. 몸서리가 쳐집니다.

개인적인 일 때문에 청계천 철공소들을 자주 찾아봤던 나에게 이 영화 속 철공소 모습들은 매우 현실감 있게 다가왔습니다. 카메라는 실제 청계천 철공소 풍경의 중요한 특징들을 빼놓지 않고 잡아냅니다. 청계천을 이토록 리얼하고 비중 있게 담아낸 것은 김기덕 감독에게 이곳은 인생의 한 시기를 살아낸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알려진 대로 김 감독은 초등학교를 마친 뒤 청계천 등지의 철공소에서 ‘쇳밥’, ‘기름밥’을 먹었습니다. 김 감독은 며칠 전 베니스에서 돌아와 귀국 회견을 하면서 “상을 받는 순간 청계천에서 무거운 짐을 지고 구리 박스를 들고 다니던 열다섯 살 내 모습이 생각났습니다.” 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한국의 일반적인 영화감독들과 완전히 다른 김기덕 감독의 특별한 인생편력을 내가 처음 알게 됐던 건 2002년 영화담당기자 시절, 신작 ‘해안선’촬영을 계기로 가졌던 단독 인터뷰 때였습니다. 어릴 적 작은 공장을 운영하신 아버님 밑에서 자라며 많은 공구들을 만지고 놀았던 나는, 철공소 경험을 가진 김 감독과 ‘우리끼리만 통하는’ 이야기를 나누며 한밤 커피숍에서 3시간이 넘도록 자리를 뜨지 못했습니다. 그때 나는 “김기덕 감독이 언젠가는 청계천에 영화 촬영 카메라를 들이대고 한 편 찍어내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때로부터 딱 10년 만에 김 감독은 ‘청계천’에서 촬영한 영화로 자기 영화 인생의 정점에 올라섰습니다.

김기덕 감독 '피에타'에서 가난한 자들에게 악랄한 폭력을 휘두르는 강도(이정진)앞에 '엄마'라며 나타난 여성(조민수)는 악마같은 강도를 아기처럼 보듬는다.

어찌 보면 미우나 고우나 감독에게 제2의 고향 같이도 느껴질 법한 청계천 골목 곳곳이지만, 스크린 속에서 청계천은 일단 어둡고 처참한 공간으로 시작합니다. 그곳은 ‘돈이 전부인 듯’ 여기는 세상의 모순이 집약된 곳처럼 표현됩니다. 청계천 철공소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경제 상황의 변동에 따라 수입이 줄어들면서 빚을 지게 되고, 악랄한 빚 독촉에 시달리게 되죠. 감독도 “우리가 사는 삶 자체가 돈 때문에 인간이, 가족이 굉장히 파괴되고 있는 게 가장 안타까웠다”며 ‘피에타’를 만든 동기를 밝힌 적이 있습니다. “이런 곳이 도대체 살 만한 세상인가”를 묻는 것이죠.

하지만 ‘피에타’속 청계천 철공소 마을은 그저 약육강식이 판치는 비극의 공간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피붙이 하나 없이 외롭게 자라온 남자 주인공에게 어느 날 “내가 네 엄마다”라며 한 여성(조민수)이 나타나면서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남을 무참하게 짓밟고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하던 이 남자의 악마성은 이 여성의 출현으로 흔들립니다. 처음엔 여자에게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하고 폭행까지 했지만, 그녀의 흔들림없는 태도에 점차 꺾이고, 어머니라는 존재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막다른 골목을 향해 치닫던 한 사내에게 모성(母性)의 힘이 구원과 속죄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이야기를 김 감독 특유의 충격적 화법으로 풀어내며 큰 여운을 남깁니다.

김기덕 감독 '피에타'의 주인공 강도(이정진)가 난폭하게 빚을 갚으라고 요구하자 채무자인 여성이 옷을 벗고는 "마음대로 하라"고 눈물 흘리고 있다. 철을 가공하는 기계들이 가득 들어찬 공업사가 이 끔찍한 드라마의 공간이다.

청계천 철공소 마을을 그저 ‘청계천’이라고 부르는 김 감독은 이곳을 ‘한국 산업의 메카’라고 애정을 듬뿍 담아 표현하기도 했지만, 아마도 젊은 날 그에게 ‘청계천’이란 갖은 어려움을 견뎌내던 공간이었을 것입니다. 이곳을 끔찍한 죽음의 공간이자 구원과 속죄를 향해가는 공간으로 그려낸 ‘피에타’에는 청계천에 대한 김 감독의 애증(愛憎)의 서려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 누구보다도 청계천 철공소와 노동자들의 삶을 잘 아는 영화감독을 가진 덕택에 서울 도심의 이방(異邦)같은 지대이던 청계천 철공소 마을의 구석구석 여러 풍경이 영화 ‘피에타’에 담겼습니다. 이미 철공소들이 많이 떠나버린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처럼, 청계천 철공소들은 오래지 않아 많이 사라지겠지만, 이곳 풍경은 국제영화제 최고상 수상 필름에 담겨 오래도록 전 세계인 마음에 남게 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