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LA·상하이·토론토 등을 뒤덮은 현대(modern) 건축물은 너무 따분(banal)하다. 나는 그런 것들을 '건축'이라고 안 부른다. 느낌(feeling), 열정(passion), 사랑(love) 같은 요소가 빠져 있다."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건축가'로 불리는 이 작달막한 사내는 유기적이고 아슬아슬한 곡면(曲面)으로 네모반듯하고 경직돼 있던 현대 건축물에 일대 파격을 가져왔다. 프랭크 게리(Gehry·83). 1989년 '건축계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프리츠커상을 수상한 그는 스페인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1997), LA 월트디즈니 콘서트홀(2003) 등 '시대의 아이콘'이 된 건축물의 설계자다. 가족여행차 방한한 그를 5일 만났다.
―영감은 어디에서 얻는가.
"2000년이 걸려도 다 말하기 힘들다. 내 영감의 원천은 그리스 조각이나 베토벤·모차르트의 음악 같은 '인문적인 전통'이다.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의 거대한 청동불, 인도의 '춤추는 시바(힌두교의 신)'상 등에서는 열정과 사랑이 느껴진다. 나는 그 열정과 사랑에서 영감을 받고, 내 작품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그 감정을 그대로 느끼길 바란다. 성공적인지 모르겠지만, 그게 내 미션(mission)이다."
―왜 곡선에 집착하나.
"정지해 있지 않고 열정적이니까. 마치 여체(女體)처럼. 나는 비행기·자동차 같은 우리가 사는 세상의 빠른 '움직임'을 건축에 반영하고 싶었다."
―당신은 '거장(巨匠)'의 반열에 올라섰지만, '과포다' '오래 가지 않을 거다'라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다.
"(크게 웃으며) 게으른 비평가들이 잘 모르고 그런 말을 하는 거다. 차라리 진부한 건물의 혼돈에 뒤덮인 현대 도시에 대해 불만을 제기하는 편이 유용하지 않을까. 내 작품은 비싸 보이지만, 예산은 소박하다. 1997년 빌바오 구겐하임을 지을 땐 평방미터(㎡)당 300달러(약 34만원)밖에 안 들었다. 2003년 월트디즈니 콘서트홀의 총 예산은 2억700만달러(약 2350억원)였다. 그리고 그 건물들은 지금까지 끄떡없다. 건물의 가치는 예산 이상이라고 생각한다."
―대표작 빌바오 구겐하임을 지어 명성을 얻었을 때, 이미 68세였다. 유명해지기 전에 방황한 적은 없나.
"명성(fame)이란 구름처럼 덧없는 것이다. 나는 한 번도 유명해지는 걸 생각해본 적이 없다. 단 한 번도 PR 담당을 고용하지 않았고, 꽤 오랫동안 내가 지은 건물 사진도 찍지 않았다. 다만 나는 오직 앞을 보고 달려왔고,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나는 어떤 저널리스트보다도 더 가혹하게 자아비판한다. 예산, 클라이언트와의 관계 등 건물 설계엔 여러 어려움이 따르지만, 절대로 변명하면 안 된다."
―구겐하임 빌바오가 당신 작품의 정점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80이 넘었는데 은퇴는 안 하나.
"구겐하임 빌바오 이후에도 많은 건물을 지었는데 왜 그런 이야길 하나. 나는 숨이 붙어 있는 한 계속 일할 거다. 끊임없이 영감이 솟아오른다."
―미생물학을 비롯한 자연과학에도 관심이 많다고 들었다.
"헨리 제임스(미국 소설가)가 '창의성이란 우물에 작대기를 넣어 휘휘 저었을 때, 그 끝에 걸려나오는 어떤 아름다움'이라고 했다. '창의성'이란 예상치 못한 어떤 '발견'이다. 건축에서의 '창의성'과 자연과학의 인간 유전자 발견 같은 건 같은 이슈라고 생각한다." (30여년 전 친구의 아내가 헌팅턴 증후군으로 죽은 후 생명과학에 관심을 가졌다는 그는 2008년 딸을 암으로 잃고, 암세포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한국 건축물 중 '종묘'를 극찬했다.
"종묘는 아름다운 여인 같다. 10년 전 종묘를 처음 봤을 때, 숨이 탁 막혔다. 문을 들어서면 바닥의 울퉁불퉁한 포석(鋪石), 그리고 그 뒤편 사당(祠堂)의 처마…(그는 테이블에 놓인 기자의 명함을 처마 모양으로 접어 보였다). 그들이 한데 어우러진 풍경이 마치 조각 같았다."
☞프랭크 게리(Gehry)
1929년 캐나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가구공장을 운영했다. 1947년 가족과 함께 LA로 이주해 남가주대(USC)에서 건축을, 하버드 디자인 대학원에서 도시계획을 전공했다. 합판, 판지, 체인 등 저렴한 재료들을 디자인 요소로 차용하고 곡선을 과감하게 도입해 건축에 일대 혁신을 꾀했다. 가구, 무대 세트 등 다방면의 디자인을 선보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