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석원 화가

난 전생에 사막의 들쥐인 줄 알았다. 스물 몇 살 때인가 처음 가 본 아프리카 사하라 사막의 알 수 없는 편안함, 언젠가 와봤던 것 같은 익숙함, 황금빛 모래와 쏟아지는 별들의 애틋한 아름다움. 이유는 알지 못한 채 슬픔을 머금은 사막의 아름다움에 단박 난 젖어들었다. 나는 그저 내 전생과 관련된 고향 이전의 고향을 생각했다. 그래서 때때로 들쥐가 되어 별이 반짝이는 사막을 헤매고 있는 나를 상상하기도 했다.

결혼을 하고 아기를 낳고 그 아이들이 초등학교를 다니게 됐을 때 다시 사하라를 찾았다. 아이들과 사막 한가운데서 텐트를 치고 누운 채 별들을 보았다. 작고 예쁜 사막여우도 보았다. 사막의 밤바람에 살랑거리는 아이들의 머플러도 보았다. 수많은 별 중 유독 반짝이는 어느 별을 보면서 오래전에 알았던 한 작은 별에 관한 기억이 저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불현듯 나타나기 시작했다. 소혹성 B612호. '어린 왕자'에 등장하는 혹성의 이름이다. 잃어버렸던, 잊고 있었던 인간다움의 가치를 불러일으켜준 불후의 진실들이 떠올랐다. 연약하고 순결한 어린왕자와 해후한 것이다.

<div style="text-align:center"><span style="padding: 0 5px 0 0;"><a href=http://www.yes24.com/24/goods/2543067?CategoryNumber=001001017001007001&pid=106710 target='_blank'><img src=http://image.chosun.com/books/200811/buy_0528.gif width=60 height=20 border=0></a></span><a href=http://www.yes24.com/home/openinside/viewer0.asp?code=2543067 target='_blank'><img src=http://image.chosun.com/books/200811/pre_0528.gif width=60 height=20 border=0></a><

모래와 바람과 별이 있다면 그곳은 어린왕자의 영토다. 사막에 누워있는 나에게 지구 밖 별들의 동네에서 바람의 발자국을 남기며 어린왕자는 다시 찾아왔다. 여전히 그는 황금빛 머리카락에 키도 더 이상 자라지 않았다. 내가 중학생 시절 처음 알았을 적엔 지구별에서의 슬픈 이별을 이해 못 했다. 어린왕자는 정말 죽은 건지, 장미꽃을 돌보러 자기 별로 돌아간 것인지 확실히 알 수 없었다. 그러던 그가 우연히 다시 내 마음속으로 찾아왔다. 그러고는 이 황량한 지구에서 목말라 하던 나에게 사막 어딘가에 숨어 있는 우물에서 녹슨 도르래로 신선한 샘물을 길어 내게 마시게 했다. 갈증이 사라졌다. 이제는 알 것 같다. 한 조각 구름이 사라졌다가 다시 피어나는 것처럼, 어린 왕자는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것이었다고. 화엄경 속 선재동자의 만행(卍行)이 어린왕자의 지구별 여행과 겹쳐졌다. 아직도 조금은 슬픈 듯 보이지만 여전히 아름답고도 순결한 영혼과 지혜를 가지고 있었다. 나는 어린왕자와의 지난 추억을 새록새록 되새김질했다. 이제 그는 언제나 나와 함께 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어린왕자를 처음 만났을 땐 나 역시 어렸다. 그가 말했던 외로움, 쓸쓸함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어린왕자의 고독은 어른이 된 지금에서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어린왕자보다 불과 조금 더 큰 그의 작은 별에선 해가 지는 것을 바라보는 기쁨만이 고독한 삶을 견디는 유일한 위안이라고 했다. 그래서 어떤 날은 하루 동안에만 무려 마흔세 번이나 의자를 조금씩 옮겨가며 해가 지는 걸 봐야 할 만큼 쓸쓸했었고. 얼마나 외로웠을까….

화가 사석원씨가 인도여행에서 구입한 옛 문서용지에 어린왕자 캐릭터를 새로 그려 넣어 완성한 작품. 아래의 코끼리는 종이 위에 인도 특유의 석채(石彩)로 이미 채색되어 있던 그림인데, 사씨가 그 테두리에 새로 굵은 선을 그려넣었다. 사석원식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인 셈이다.

고백할 것이 있다. 애석하게도 난 눈뜬장님이다. 어린왕자의 아저씨(생텍쥐페리)가 그린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은, 설명이 없다면 나 역시 "이건 모자야!" 하며 아직도 모를 것 같다. 그 아저씨는 자기 그림을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해 꿈꿨던 화가의 길을 포기하고 조종사가 되었다. 그런데 나는, 나는 그만 화가가 되고 말았다. 부끄럽다. 화가라면 마음으로 볼 줄 알아야 될 텐데. 또한 술을 마신다는 것이 부끄럽고, 부끄러운 것을 잊기 위해 술을 마신다는 술고래 이야기도 남의 얘기만은 아니다. 그만 나도 이상한 어른이 되고 말았다.

별이 쏟아지는 밤의 사하라에서 작은 사막여우를 봤을 때 그 신비로움을 잊을 수가 없다. 풀밭에 엎드려 울고 있던 어린왕자에게 위로하듯 읊조리던 여우의 얘기를 다시 꺼내어 여러 번 읽었다. "네 장미가 그다지도 소중한 것은 네 장미를 위하여 잃어버린 시간 때문이야." 여우의 말은 내 삶을 되돌아 보게 했다. 내 친구들, 가족들, 내가 알았던 모든 관계들…. 길들인 것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 한다고 했다. "넌 네 장미에 대하여 책임이 있는 거야…." 가슴이 저며왔다. 책임, 책임, 책임. 책임이란 단어가 메아리처럼 온몸 구석구석을 때리며 튕겨 나갔다. 기억하기도 싫은 모순과 실수의 연속이었던 나의 삶이었기에.

이제는 아름다운 친구 어린왕자와 헤어질 수 없는 분명한 이유가 생겼다. 나에게 영소(永少)라는 과분한 호(號)가 생긴 것이다. 영원한 소년처럼 살라고 나를 아끼는 고마운 분이 한 해 전 지어 주셨다. 운명이다. 영원히 소년이 되어 어린 왕자와 동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행복한 족쇄다. 나의 하늘엔 늘 별 하나가 유독 반짝거릴 것이다.

[140자 트윗독후감]

"어린왕자와 사막여우의 대화가 가슴에 와서 박히는 걸 보고, 이 책을 읽어야 할 '어른'이 되었다는 생각에 처음부터 다시 읽었습니다. '어른들은 모른다'는 말이 많이 나오더군요. 참 이상한 건, 어른이 되니 그 말들의 의미를 더 잘 알겠더라는 겁니다." (페이스북 응모자 Eunae 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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