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11월 첫 내한 공연을 앞둔 피아니스트 라두 루푸. 연주회에 앞서 피아노와 냉난방, 인터뷰 사절과 의자 준비까지 까다로운 조건을 내걸었다.

루마니아 출신의 피아니스트 라두 루푸(67)는 1966년 미국 반 클라이번 콩쿠르와 1969년 영국 리즈 콩쿠르를 모두 석권한 뒤, 지금껏 정상에서 내려온 적이 없다. 특히 느리고 서정적인 악장에서 빛나는 광채를 건반에 투사해서 관객들의 탄성을 절로 자아내는, 음색의 마술사다.

하지만 세계 음악 평단에서는 이 피아니스트의 이름만 들으면 손사래부터 절레절레 내젓는다. 30여 년째 언론 인터뷰에 일절 응한 적이 없어 속을 시커멓게 태우기 때문. 그래서 그의 별명도 '건반 위의 은둔자'다. 지난 2010년 첫 내한 예정이었지만, 일본 공연 도중 건강 악화를 이유로 남은 일정을 모두 취소해서 국내 음악 애호가들의 애간장을 태우기도 했다.

루푸가 2년 만에 다시 한국을 찾는다. 오는 11월 17일 슈베르트의 피아노 독주곡으로 리사이틀을 열고, 이틀 뒤인 19일에는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3~4번을 연달아 연주하는 일정이지만, 실은 '내한 예정'이라고 하는 편이 더욱 정확할지 모른다. 세심한 건강 조절이나 컨디션 체크 때문에 실제 공연장에 들어서기 직전까지는 누구도 성사 여부를 장담할 수 없는 '까칠한 남자'이기 때문.

11월 내한 공연에 앞서서도 그의 까다로운 요구 조건은 여전했다. 우선 그가 사용할 피아노는 "스타인웨이가 제작한 연주회용 그랜드피아노(grand piano) 중에서도 일련번호 6자리 가운데 첫 3자리가 578을 넘지 말아야 한다"는 독특한 조건을 내걸었다. 피아노 건반의 무게는 저음에서도 53g을 넘지 말아야 하고, 루푸가 의문을 가지면 언제든지 건반 무게를 측정할 수 있도록 조율사가 실측 장비를 갖고 있어야 한다고도 명시했다. 음악계에서는 "세계 피아노의 명가 스타인웨이의 악기 중에서도 루푸가 무겁고 어두운 음색보다는 상대적으로 투명하거나 맑은 음색을 선호한다는 의미"로 해석하고 있다. 다행히 예술의전당에 연주용으로 보관 중인 7대의 스타인웨이 피아노 가운데 2대가 이 조건에 들어맞는다.

공연이나 리허설 때 냉난방은 연주자 자신이 결정해야 한다고 못박은 건 차라리 애교에 속한다. 연주 때는 촬영이나 인터뷰, 인터넷 중계도 절대 안 되고 공연장 천장에 붙어 있는 녹음용 마이크도 모두 제거하라고 요구했다. "당일 공연장 안에 들어온 관객만 감상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연주자를 위해 걸상을 3개 이상 사전에 준비해야 한다고 내건 점도 이채롭다. 등받이가 없는 의자를 선호하는 여느 피아니스트와 달리, 루푸는 사무용 의자처럼 등받이가 있는 의자를 고집한다. 지난 시즌 루체른이나 제네바 협연 당시에도 그는 잠시 연주를 쉴 때면 어김없이 등받이에 기대고서 나지막한 눈빛으로 오케스트라를 응시했다. 그에게 수차례 레슨을 받으며 교류해온 피아니스트 김선욱은 "루푸는 '순간의 마법'을 빚어낼 만큼 음색에 대한 고집이 대단한 연주자"라며 "그의 비법은 연주하는 순간만이 아니라 그 이전부터 시작한다는 걸 알 수 있다"고 말했다.

▲라두 루푸 연주회, 11월 17일(독주회) 오후 7시·19일(협연) 오후 8시 예술의전당, (02)541-31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