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완 산업부 기자

1985년 겨울 학력고사를 마친 홀가분한 기분에 친구 둘과 함께 시내 중심가로 나갔다. 주머니엔 모아뒀던 돈이 조금 있었고, 각자 보고 싶은 책을 사서 돌려보기로 했다. 제과점에서 풍겨오는 빵 냄새의 유혹을 뿌리치고 조금 더 걸어 서점의 문을 열었다. 그저 제일 두꺼운 책을 사야 하릴없는 고3의 겨울을 날 수 있겠다 싶었다. 한 친구는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골랐고, 나는 비슷한 두께인 리처드 리키의 '오리진'을 집었다.

27년 동안 잊고 지내던 기억이 지난주에 어제인 듯 살아났다. 영국의 과학저널 '네이처'에서 '리키(Leakey)'라는 반가운 이름을 다시 만난 것이다. 9일자 네이처 표지논문의 제1저자인 미브 리키(70) 박사는 고3 겨울에 만났던 리처드 리키(68) 박사의 아내고, 교신저자인 루이즈 리키(40) 박사는 그들의 딸이었다.

논문은 그 자체로 리키 가문과 인류 진화 연구의 역사였다. 50여년 전까지만 해도 인류의 가장 오래된 조상은 우리처럼 똑바로 서서 걷기 시작한 180만년 전의 호모 에렉투스, 즉 '직립(直立) 인간'이라고 믿었다. 중국 베이징인도네시아 자바에서 발견된 화석이 여기에 속한다. 호모 에렉투스는 이후 오늘날 인류의 직계 조상인 호모 사피엔스로 진화했다.

리키 가문은 이 정설을 무너뜨리고 인류의 진화사를 새로 썼다. 아프리카 케냐에 정착한 영국 선교사 부부의 아들인 루이스 리키(1903~1972) 박사는 아내 메리 리키(1913~ 1996)와 함께 1960년대 초 아프리카 탄자니아 올두바이 골짜기에서 호모 에렉투스보다 70만년 앞서 나타난 인류의 조상 화석을 발견했다. 초보적인 석기(石器)들도 함께 발굴됐다. 바로 '손을 쓰는 인간'이란 뜻의 호모 하빌리스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burbuck@chosun.com

루이스 리키의 둘째 아들인 리처드 리키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고인류학자가 됐다. 그는 1970년 발굴팀의 동료이던 미브 리키와 결혼하고 케냐 북부의 루돌프 호수(지금의 투르카나 호수) 지역을 발굴했다. 1972년 이들 부부는 호모 하빌리스와 비슷한 시기이지만 생김새가 전혀 다른 인간의 두개골 화석을 발견했다. 그들은 호모 하빌리스와 달리 얼굴이 평평하고 두개골이 큰 이 화석에 발굴지의 이름을 따서 호모 루돌펜시스란 이름을 붙였다. 리처드 리키가 발견한 호모 루돌펜시스 화석은 턱뼈나 이빨도 없는 달랑 두개골 하나만이어서 독립된 인류 조상 종(種)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는 1989년 이후 고인류학 연구를 그만두고 지금은 아프리카 야생동물 보호운동에 전념하고 있다.

이번 네이처 논문은 리처드 리키의 생각이 옳았음을 40년 만에 입증한 것이다. 미브 리키와 루이즈 리키 모녀(母女)는 40년 전 발굴지와 가까운 곳에서 2007년과 2009년 잇따라 두개골과 턱뼈 등을 발굴했다. 모양은 호모 루돌펜시스와 똑같았다. 이로써 인류 진화는 한 종이 멸종하고 다른 종이 나타나는 단선적인 경로가 아니라 여러 종이 공존하며 경쟁하는 복선적인 형태였음이 입증됐다.

리키 가문은 인류 진화 연구의 폭을 영장류 행동 연구로까지 확장시켰다. 화석만으로는 인류의 조상이 어떻게 살았는지 알기가 쉽지 않다. 루이스 리키 박사는 인류와 같은 영장류인 침팬지·고릴라·오랑우탄의 생태를 연구하면 인류 진화 연구의 빈 공간을 채울 수 있다고 봤다. 그는 연구비를 모아 각각의 영장류마다 한 명씩의 젊은 연구자를 지원하기로 했다. 그때 침팬지 연구자로 뽑힌 사람이 세계적인 환경생태운동가 제인 구달이었다. 고릴라는 다이안 포시, 오랑우탄은 비루테 갈디카스가 뽑혔다. 당시 세 명은 '리키의 천사들(Leakey's Angels)'이라고 불렸다.

과학계에는 리키 가문처럼 대(代)를 이어 한 분야에서 세계적인 업적을 낸 집안이 여럿 있다. 대표적으로 퀴리 부인 집안은 노벨상 수상자를 4명이나 배출했다. 퀴리 부인은 남편 피에르 퀴리와 함께 라듐 발견으로 1903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으며, 1911년에는 혼자서 노벨 화학상도 받았다. 이들 부부의 큰딸 이렌느는 남편 프레데릭 졸리오와 함께 1935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우리나라에도 과학자 가문이 많다. 한국 최초의 화학박사인 이태규(1902~1992) 박사는 미국 로렌스리버모어국립연구소 수석연구원을 지낸 장남 이회인 박사와 함께 유타대·카이스트(KAIST)에서 숱한 한국인 제자를 길러냈다. 1970년대 '현사시나무'를 개발한 산림녹화의 선구자 현신규(1912~1986) 박사의 아들 현정오 교수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서울대 임학과의 임목육종학 전공 교수가 됐다. 원병오 경희대 명예교수는 6·25전쟁으로 아버지 원홍구(1888~1970) 박사와 남북으로 헤어졌지만, 1960년대 일련번호를 새긴 링을 달아 날려 보낸 철새를 우연히 북의 아버지가 발견했다고 알려오면서 서로 같은 길을 가고 있음을 알게 됐다.

아무리 돈이 중요한 세상이라지만 여전히 부모는 아이의 거울이다. 산과 바다에서, 밤늦은 실험실에서 순수한 연구의 열정을 불태우는 부모를 보고 자란 아이들이 몇십년 뒤 '물리학계의 김(金) 가문' '화학계의 이(李) 가문'을 이룬 모습을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