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례 없는 무더위가 계속되면서 콜라, 사이다 등 청량음료의 수요가 급증하고 있다. 이 땅의 사이다 역사는 구한말 인천 개항장에 일본 요코하마에서 생산된 '삼페인 사이다'가 들어오면서 시작되었다. 이 사이다는 식혜나 수정과만 음료의 전부인 줄 알았던 조선인들의 혀를 깜짝 놀라게 했다. 톡 쏘는 맛에 트림이 나오는 사이다를 사람들은 서양의 맛있는 소화제라며 신기해했다.
인천부사(仁川府史)에 의하면 1905년 2월 일본인 히라야마 마쓰타는 미국식 제조기와 50마력짜리 발동기를 들여와 인천 화정(지금의 신흥동) 해광사 근처 언덕에 '인천탄산수제조소'라는 사이다 공장을 차렸다. 이 공장에서는 '성인표(星印標·별표) 사이다'와 '일생표 사이다'를 제조, 판매했다. 1910년 5월에는 같은 동네에 일본인 나카야마 우노키치가 '라무네 제조소'를 설립하고 '라이온헬스표 사이다'를 생산했다. '라무네'는 물에 설탕과 포도당, 라임향 등을 첨가해 만든 달콤한 탄산음료로 일본인들이 즐겨 마셨다. 이후 소화기린맥주 회사와 대일본맥주 회사는 미쓰야 사이다, 미요시 사이다 등 일본산 사이다를 본격적으로 수입해 시판함으로써 인천에서 만든 사이다와 경쟁을 했다.
1920년대에 접어들자 사이다는 귀하면서도 인기 있는 음료수로 자리 잡았다. 1928년 6월 인천포목점조합 운동회를 개최했는데 한 포목점이 사이다 한 상자를 기증했다는 내용이 지역 신문에 보도되었고 당시 기독교부인교풍회 인천지부는 어려운 사람들에게 물건을 나눠 주었는데 그 품목 가운데 사이다가 포함돼 있을 정도로 인기를 누렸다. 1930년대 인천상의는 86개 품목을 대상으로 도소매 물가지수를 조사했는데 그 중에 사이다가 포함되었다.
신문물의 상징이자 인기 음료수였지만 아직 가난한 민중들에게는 접하기 어려운 낯선 물건이었다. 1934년 2월 7일 장의리(지금의 숭의동)에 사는 오복동(30)씨는 인천 축항에서 약품 상자를 운반하는 일을 하다가 독극물이 담긴 병을 사이다인 줄 알고 훔쳐 집에 갖고 가서 굶주린 자신의 아내 박씨(19)와 나눠 마셨다. 그는 목숨을 건졌고 아내는 죽었다. 그런데 이 극약을 사이다인 줄 알고 훔쳐간 노동자가 오씨 말고도 십수 명이 있어서 인천경찰서는 대경실색하고 극약의 행방을 수색했다.
해방이 되자 인천탄산수제조소를 손욱래씨가 인수하여 ㈜경인합동음료로 회사명을 바꾸고 '스타사이다'라는 이름의 사이다를 생산했다. 그 무렵 전국에는 12개의 사이다 생산업체가 난립해 있었지만 인천의 '스타사이다', 서울의 '서울사이다', 평양의 '금강사이다'가 각축전을 벌였다. 그러던 중 1950년 5월 서울에서 동방청량음료의 '칠성사이다'가 출시되면서 사이다 업계를 차츰 평정해 나갔다. 인천의 '스타사이다' 역시 고전을 면치 못했지만 1960년대까지 지역신문에 '순당(純糖), 고급음료 뉴스타 사이다'라는 광고를 내며 그럭저럭 생산을 이어갔다. 그러나 결국 칠성사이다에 통합되면서 인천 사이다의 화려했던 역사를 마감한다. 사이다는 아니지만 인천에서 음료수 생산의 역사는 이어졌다. 인천시사는 1970년대 1000여명의 종업원이 근무하는 해태제과 음료사업부가 부평구 작전동에 자리 잡고 오렌지주스와 넥타를 생산했음을 기록하고 있다.
인천 사이다는 사라진 지 오래되었지만 노래의 일부분으로 남아 심심치 않게 사람들의 입에서 불리고 있다. 1960년대 코미디언 고(故) 서영춘씨는 '인천 앞바다에 사이다가 떴어도 고뿌(컵)가 없으면 못 마십니다'라는 일명 '사이다송'을 불렀다. 2009년 인천시가 '인천방문의 해' 홍보를 위해 뮤직비디오를 제작하면서 이 노래의 원조 서씨의 목소리를 그대로 담아 잠시 인천 사이다가 입에 오르내리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