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의 상징처럼 여겨졌던 낮잠 풍습 ‘시에스타(siesta)’가 경제난에 휩쓸려 사라질 위기에 놓였다.
스페인 일간지 라 누에바 에스파냐는 최근 스페인 정부가 경기 부양을 위해 연면적 300제곱미터가 넘는 중대형 상점과 식당들의 영업시간을 지금보다 25% 늘리는 방안을 승인했다고 전했다.
이 방안에 따르면 중대형 상가들의 영업시간은 근무시간은 주당 72시간에서 90시간으로 늘어나게 된다. 하루 평균 영업시간이 2시간에서 많게는 3시간까지 늘어난 셈이다. 이로 인해 오후 낮잠 시간이던 시에스타에도 영업을 계속해야 할 처지에 놓인 것.
스페인을 포함한 이탈리아·그리스·포르투갈 등 지중해 연안 국가들과 라틴아메리카에서는 태양이 이글거리는 한낮에 한 두 시간 정도 낮잠을 취하는 습관이 일상화돼 있다.
이 시간에는 무더위 때문에 일을 해도 효율이 떨어지므로, 낮잠을 통해 원기를 회복하는 대신 저녁 늦게까지 일하자는 취지다. 지난 1930년대 스페인 내전 동안, 돈을 벌기 위해 밤낮으로 두 개 이상의 직장에서 일했던 가난한 근로자들이 낮동안 잠시 휴식을 취한 데서 비롯했다는 학설도 있다.
시에스타는 상점이나 레스토랑 등 개인사업체는 물론 한때 은행이나 방송국, 관공서조차 쉴 정도로 일반적인 관행이었다. 스페인 사람들에게는 오후 2시부터 4시까지 시에스타 후 늦은 저녁인 8시에서 9시에 퇴근하는 게 일상이었을 정도다. 스페인의 노벨상 작가인 카밀로 호세 셀라는 시에스타를 두고 ‘스페인의 요가’라고 칭송했다.
그러나 지난 2005년 정부가 공무원들을 대상으로 시에스타를 공식적으로 폐지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당시 행정부 장관이던 호르디 세비야는 "긴 점심시간 때문에 다른 유럽 국가들과 비즈니스 스케줄을 맞추기 어려워 수출입에 많은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며 점심시간을 다른 유럽 국가들과 같은 12시부터 1시까지로 바꿨다. 퇴근시간 역시 6시로 당겨졌다. 공무원들이 낮잠을 잘 여유가 없어진 것이다.
전문가들은 이번 제도 개선으로 인해 식당 등 개인사업체를 중심으로 그나마 남아있던 시에스타마저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고 분석했다. 정부의 규제를 지키기 위해서는 시에스타 없이 영업을 계속해야 하기 때문이다.
기업 컨설팅 전문가인 알레한드라 무어는 "스페인에서 시에스타를 포함한 긴 점심시간은 대인 관계를 형성하는 주요한 방식"이라며 "시에스타와 노동 생산성 사이에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 좀 더 면밀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스페인 정부는 이번 제도를 통해 시에스타가 없어지고, 대신 영업시간이 늘어나면 소비와 고용 증대 효과가 있을 것으로 예측했다. 블룸버그 비즈니스위크에 따르면 스페인 정부는 이번 규제로 33만7581명을 고용하는 효과와 연간 172억유로의 경제 성장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집계했다.
시에스타 폐지를 주장해 온 스페인 경제단체연합의 클라우디오 보아다 회장은 스페인 일간지 라 인포르마시온과의 인터뷰에서 "스페인이 시에스타로 인해 보는 손실이 국내총생산(GDP)의 약 8%에 달한다"며 "내수 경기 활성화를 위해 영업시간을 더 늘려야 한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