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이 딸의 불효를 용서해 주세요. 이 어두운 허무함 속에서는 더 이상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다른 영원한 세계를 찾아가야겠습니다."
1931년 월간지 '신여성' 5월호에는 이런 편지글이 실렸다. 발신자는 홍옥임. 스스로 목숨을 끊으며 남긴 유서였다.
엄혹했던 일제강점기 이런 유의 자살이 젊은 층에 유행병처럼 번진 적이 있었다. 1920~40년 조선·동아일보에 보도된 자살 기사만 3만건 이상을 헤아렸다. 자살자들은 한강에 몸을 던지거나, 목을 매거나, 달리는 기차에 뛰어들었다. 젊은이들의 자살 현장에는 유서가 남아 있는 경우가 많았다. 자살 사건 보도 중 약 300건 가까운 기사에 유서의 전문, 혹은 일부가 게재됐다.
◇염세·권태…흡사한 유서 내용
최근 고려대에서 열린 세계한국학센터 컨소시엄 워크숍에서 하버드대 박사과정의 제니퍼 염 연구원은 이 자살 유서들을 토대로 '1920~40년 식민지 시기 한국의 자살 유서와 글래머(Glamour·자기과시) 문화'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자살자들은 20대를 중심으로 10대 후반~30대 초, 동경이나 서양 유학을 다녀온 고학력자, 서울을 비롯한 도시 거주자들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
눈길은 끄는 것은 유서의 내용. 단어 선택이나 표현이 소름끼칠 정도로 중복되는 경우가 많았다. '염세' '권태' '타락' '세상 비관' '쓸모없고 냉정한 세상' '영원한 세상을 향해' '더 좋은 세상으로 떠난다'는 말들이 반복해서 등장했다.
'염세'나 '비관'은 당시 세계 식자층에 유행하던 단어들이었다. 독일 출신 유럽학의 대가인 레인하드 쿤(1930~1980)에 따르면 '권태(ennui)'는 19세기 후반 이후 서구 문학의 지배적인 주제어. '낭만 자살' 역시 한때 서구를 휩쓴 열병이었다. 논문은 이런 서구의 문화 트렌드가 당시 국내 인텔리층에도 일찌감치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준다고 해석했다.
1920~30년대 국내에는 서구문학이 본격 유입됐고, 젊은 층은 그 속의 감수성을 내면화했다. 윤치호는 1931년 4월 10일 일기에서 "지나치게 감정적인 소설들이 교육받은 한국 여성의 마음에 영웅심과 자살 같은 병적인 관념을 채워넣고 있다"고 개탄할 정도였다.
당시 젊은 층의 자살은 오늘날 학계에서 말하는 '자살의 전염성'을 보여준다.
1920~40년대 '자살 열풍' 중심에는 한국 최초 성악가수인 윤심덕과 갑부집 아들 김우진의 동반 자살이 있었다. 둘은 1926년 8월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던 중 현해탄에 투신했다. 죽기 전 일본에서 취입한 '사의 찬미' 가사는 마지막 유언으로 간주됐고, 그 전문은 신문에 대서특필됐다.
◇유서에 투영된 '과시욕망'
염 연구원은 일제강점기에 빈번했던 청년들의 자살 유서를 당시 근대화 초입에 생겨난 '글래머 문화'로 해석했다. '돋보이는 매력'이란 뜻의 '글래머(glamour)'는 고(古)영어 '문법(grammar)'에서 파생된 단어로, '어떤 유의 특별한 학식'이란 뜻을 담고 있다. 학식 자체가 어원적으로 사회적 매력이나 그것의 과시와 관련이 깊다는 것이 최근 학계의 해석이다.
당시 도시의 교육받은 젊은이들은 자살 의식과 유서를 통해 자기만의 슬픔과 자기파괴 충동을 사회에 드러내 보이려 했다는 것. 이런 배경에는 새로운 매체 환경도 한몫했다. 신문과 라디오 등 대중매체는 자살 사건과 유서 내용을 충실히 보도함으로써 '과시 문화'의 무대를 형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