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9년(중종 34) 봄 나라는 황태자 책봉을 알리는 중국 사신을 맞이하였다. 이때 26살의 신예문사가 태평관 연회에서 발표한 장편 서사는 유수 같았다. 중화세계의 평화를 노래하고 우리 문물을 과시했는데, 이렇게 시작한다.

"상제의 어짊은 가없어 사해가 일가더라. 물이 동해로 흘러, 왕업의 기틀이 비롯하였네."

중국 사신은 신예문사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다. '동국 가인(佳人)'으로 칭송하며 중국 관광에 초대하였다. 관광은 관국지광(觀國之光), 중국의 빛을 보러 사절로 오라는 것이다. 또한 그대 고향을 찾겠노라, 하였다. 금호는 영산강이다. "언제 뗏목 타고 금호(錦湖)에 가리라." 혹은 "전라도 길에 꽃샘바람 차게 불면, 영산포구는 소용돌이 여울물에 크게 놀랄게야."

이때 신예문사가 자호를 금호로 삼았던 임형수(林亨秀·1514∼1547)였다. 무척 고향의 풍광과 물산을 자랑한 듯싶다. 18살(1531) 생원 되고, 4년 후 문과 급제하였다. 곧바로 국왕이 베푼 시회에서 2위를 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나주시 송현동 출생으로 본관은 평택.

기상이 호방하고 문장과 궁마가 뛰어나 문무를 겸비한 국기(國器)로 기대를 모았다. 또한 미남자. 그런데 해학이 지나쳐 남을 얕잡아본다는 오해를 샀다. 이조 좌랑 시절 매몰찬 선배 정랑의 책상에 적었다. '밉고 싫은 물건을 누가 낳았을까? 자라면서 삐뚤어져 휘하 인재에게 모진 게로군.'

임형수 묘역. 부인 하동 정씨와 쌍분으로 나주시 송월동 선영. 네 개의 비석은 오른쪽부터 추기비(追記碑), 신도비(神道碑), 옛 표석, 새 표석이다. 추기비는 임형수의 아들 임구(林枸)가 산간 절도로 떠돌아 족보에 오르지 못하였고, 둘째 사위 유경진(柳景進)의 후손 즉 외손이 제사를 지냈다는 사연이 적혀 있다. 신도비는 17세기 후반 김수항에게 받은 묘갈문을 새겨 최근 세웠다.

성균관에서 설산의 멧돼지 사냥 이야기로 열셋 연상 이황을 놀린 일화도 있다. "사나이의 기이하고 장대한 취미를 아시는가? 다만 필묵 다루는 작은 재주뿐일세." 그러나 내심은 아니었다. 혼탁한 세월을 이겨내는 선비의 절개와 고난을 고스란히 투영한 영천자 신잠의 묵죽도에 적었다. '영천의 붓끝에서 나온 푸른 대나무, 소상강 어귀에 솟고 설월은 차가워라. 시인에서 추려보면 누구를 닮았을까? 맑고 수척한 모습은 마땅히 퇴계와 견주어야지.'

한편 감춤과 속임을 참지 못하였다. 세자의 외숙인 대윤과 문정왕후가 낳은 경원대군의 외숙인 소윤이 권력을 다툴 때였다. "한둘만 곤장 치면 진정될 것이다." 문정왕후의 위아래 동기인 윤원로·원형 형제였다. 함경도 회령부 판관을 마치고선 뇌물이 내정으로 몰린다고 규탄하였다. 내정은 문정왕후였다.

1544년 11월 중종이 훙거하고, 7개월 후 인종이 따르자 신음은 깊었다. "어찌 오늘 눈물로 작년 젖은 수건을 거듭 적실 줄이야!" 직후 제주목사로 갔다가 파직되고, 양재역에 문정왕후의 섭정을 비판하는 벽서가 붙으면서 죽음을 받았다. 향년 34세. 열 살 아들에게 남겼다. "내가 나쁜 짓을 하지 않았는데 이 지경이니 글을 배우지 말라." 조금 후 다시 일렀다. "배우더라도 과거는 응시하지 말라."

이황은 놀랐다. "실로 기이한 남아가 죽을 죄가 아닌데 정말로 원통하다." 만년에도 간혹 임형수의 시구를 읊조렸다. "꽃이 고개 숙이니 술 취한 미녀의 얼굴이며, 산이 끊어지니 바닷물 들이키는 푸른 용의 허리로세."

김인후의 상실감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유명한 시조는 임형수를 위한 애사였다.

"엊그제 베인 나무 백 척 장송 아니런가. 적은 듯 두었던들 동량이 되리러니, 이후에 명당 기울면 어느 나무가 받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