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밍웨이 저작권(사후 50년)이 소멸된 올해, 민음사·문학동네·열린책들·시공사·다상(출간일순)에서 '노인과 바다' 5종이 출간됐다. 대체 어떤 책을 골라야 할까 따져보기 위해 블라인드 테스트(blind test)를 해봤다. 전문가 그룹에게 표지를 제거한 책 5종을 보내 번역, 서체·자간 등 가독성을 평가해달라고 부탁했고, 표지 디자인, 독자 반응을 출판·서점 관계자에게 취재했다.
◇개성 다른 5종의 번역
첫 문장부터 달랐다. '그는 멕시코 만류에서 조그만 돛단배로 혼자 고기잡이를 하는 노인이었다'로 시작한 건 문학동네판, '그는 걸프 해류에서 조각배를 타고서 혼자 낚시하는 노인이었고, 고기를 단 한 마리도 잡지 못한 날이 이제 84일이었다'로 들어간 건 열린책들판이었다. 나머지도 조금씩 차이가 있었다.
'노인과 바다'는 젊은 시절, 문학계의 수퍼스타로 군림하던 헤밍웨이가 지독한 슬럼프를 겪은 후 혼신의 힘을 다해 발표한 작품이다. 주어·동사로만 묶인 하드보일드 문체가 두드러진다. 그 문체 때문에 헤밍웨이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서독에서 특히 큰 사랑을 받았다. 히틀러의 나치 독일은 국가 선전물에 형용사·부사를 많이 썼고, 그런 문체에 질려있던 서독 국민은 감정을 배제한 헤밍웨이의 문장에 환호했다.
김욱동 한국외대 교수가 번역한 민음사판은 "바다에서 노인이 벌이는 사투를 활달하고 호방하게 표현했다", 장경렬 서울대 교수의 시공사판은 "단어 하나하나를 정밀하게 연구해 꼼꼼하다"는 반응을 얻었다.
문학평론가 유종호 연세대 명예교수는 "헤밍웨이의 비정한(감정을 배제한) 문체, 노인에 의탁해서 표현한 삶에 대한 강렬한 의지, 노인이 되어서도 굴하지 않는 정신, 이게 어느 번역서에 잘 드러나 있는가를 검토해 보면 자연히 어느 작품이 원작에 충실한 번역인지 알 수 있을 것"이라며 "똑같이 고기 잡는 어부의 얘기인데 문장이 까다롭고 복잡한 허먼 멜빌의 '모비딕'과 비교해 가며 읽으면 더 재미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특정 타깃 겨냥한 가독성
같은 '노인과 바다'라도 내부구성과 종이질에서 차이가 뚜렷했다.
한미화 출판평론가는 민음사판에 대해 "판형이 좁고 가벼워 들고 다니기 좋다. 획의 윗부분에 삐침이 있는 독특한 서체이지만 자간이 넓어 좀 벙벙해 보인다"고 말했다. 문학동네판은 자간·행간의 넓이가 적당해 읽을 때 눈이 덜 아프다, 반면 열린책들판은 글자를 빼곡히 채워넣어 자간이 좁고 글자 색도 짙어 아쉽다는 평을 얻었다.
시공사판은 상세한 역자해설과 연보가 좋은 점수를 얻었다. 김수정 영풍문고 문학 북마스터는 "약력만 봐도 헤밍웨이가 어떤 계기로 이 작품을 썼는지 알 수 있게 써놓아서 중·고등학생들에게 추천해주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나 5종 중 유일하게 라이프지 초판에 수록됐던 컬러 삽화가 들어가 있는 데 대해서는 "어른을 위한 소설책이기 때문에 그림이 있든 없든 상관없다"는 얘기가 나왔다.
"학교 앞 서점에서 쉽게 살 수 있는 전형적 유형"이란 평을 받은 다상판. 중·고등학생들이 좋아하는 흰 종이를 써서 산뜻한 느낌을 주지만 바로 그 흰 종이가 형광등에 반사되면 눈이 아프다는 단점이 있다.
◇표지 디자인
흰 바탕에 푸른색 바다와 까만 만새기(생선)를 그려넣은 표지 일러스트. 실로 꿰매는 방식으로 만들어 300쪽이 넘는데도 가볍고, 핸드백에 쏙 들어간다. 20~30대 직장 여성들이 선호하는 열린책들판이다. '킬리만자로의 눈' '인디언 부락' 등 단편 7편도 함께 수록했다.
한 남자가 작은 배 위에 앉아있는 문학동네판 표지도 작품 자체의 묵직한 분위기를 잘 살렸다는 평을 받았다. 반면 '무기여 잘 있어라'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등 헤밍웨이의 다른 대표작 4권과 함께 선집으로 묶은 시공사판은 표지가 회색 바탕이라 눈길이 잘 안 간다는 지적이 나왔다. 세계문학전집 시리즈의 278번째 작품인 민음사판은 "살짝 촌스럽다"는 반응.
◇판매량은 1사 독주
본지가 국내 대형 온·오프라인 서점 네 곳(교보문고·영풍문고·예스24·인터파크)의 지난 27일까지 판매량을 낱권 단위로 세어본 결과 가장 많이 팔린 건 문학동네판이었다.
[블라인드 테스트에 참여한 분]
유종호 연세대 명예교수, 한미화 출판평론가, 유지훈 블로그 '헤밍웨이의 길' 운영자, 박래풍 영풍문고 차장, 김수정 영풍문고 북마스터, 황원경 교보문고 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