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희적인 성격이 짙어졌지만, 연극의 기원은 일종의 제의(祭儀)에 가깝다.
고대 인간은 변화무쌍한 자연의 위협에 무방비로 노출됐다. 자연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각종 모방의식을 만들어낸 이유다. 이 의식의 중심에는 제사장이 있다. 각종 몸짓과 춤으로 제의를 이끌어간다. 지금의 배우와 마찬가지다. 이 제사장이자 배우는 주문, 연극으로 말하자면 대사 등을 사용한 복잡한 이야기로 극적인 꾸밈새를 만들어 나간다. 여기에서 신화가 탄생했고, 연극은 이로부터 드라마를 갖춘다.
'그을린 사랑'은 그 어느 작품보다 연극의 기원으로 더 거슬러올라간다. 그리스 신화 '오이디푸스'의 모티브와 맞닿았다. '아비를 죽이고 어미를 범한다'는 비극의 주인공 오이디푸스의 가혹한 운명은 극중 인물 '이오카스테'에게 그대로 옮겨진다.
사랑에 빠져 애인의 아이를 가진 14세 사춘기 소녀 '나왈'로부터 이야기는 시작한다. 그녀는 전쟁으로 찢긴 땅에서 자신에게 벌어진 일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 훗날 나왈의 쌍둥이 남매 '잔느'와 '시몽' 역시 어머니의 과거를 찾기 위한 여정을 출발한다. 나왈의 삶을 통해 결국 자신들의 근원과 만나게 된다. 이오카스테로 인해 촉발된, 아니 전쟁의 피해자이자 가해자인 이오카스테로 인한 오이디푸스의 비극이 주축인 그 근원은 쉽게 감당할 수 없다. '그을린 사랑'은 참혹한 진실을 꿋꿋이 바라보며 묵직한 직구처럼 나아간다. 인물들은 뫼비우스 띠처럼 자신들을 둘러싼 가혹한 운명을 자신들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힘들지만 버텨낸다.
레바논 태생 캐나다 작가 겸 연출가 와즈디 무아와드(44)의 희곡이 바탕이다. 한국에서는 희곡을 원작으로 한 캐나다 드니 빌뇌브(45) 감독의 동명영화로 먼저 알려졌다. 이 영화는 지난해 예술영화 최다관객을 기록하며 화제를 모았다.
냉철한 시선과 사실적 화법의 영화와 달리 '하얀 앵두' '다윈의 거북이' 등을 통해 치밀함을 인정받은 김동현씨가 연출한 연극은 풍부하고 강렬한 대사의 힘을 빌린다. 영화가 담담한 카메라 워크로 조용한 분노를 불러온다면 연극은 감정을 솔직하게 실은 뜨거운 대사로 응축된 인물들의 한을 폭발시킨다.
바닥에 쓰는 글씨를 스크린을 통해 보여주고 대학 수학강사인 잔느의 강의 장면을 프레젠테이션을 활용하는 등 현대적인 기법은 극에 리듬을 부여한다.
한 여인의 길고 긴 이야기를 시기별로 전하기 위해 이다아야, 배해선, 이연규 등 연극배우 3명이 나왈을 나눠 연기한다. 사랑스럽지만 연약하고 희망에 차 있는 어린 나왈은 이다아야, 정당한 분노로 타올라 용감하고 당당한 중년의 나왈은 배해선, 슬픔에 잠겨 말을 잃어버린 나왈은 이연규가 맡았다. 뮤지컬에서 활약한 배해선은 재발견이라고 할 만큼 손색 없는 정통 연기를 선보인다. 비극적인 진실을 알아차린 뒤 절규하는 이연규의 표정은 연극이 끝나도 쉬 잊혀지지 않는다.
연극 '유랑극단 쇼팔로비치'의 슬라브 정서로 가득한 음악으로 주목 받은 싱어송라이터 정재일은 멜로디와 리듬보다는 전자소리를 활용하며 긴박감을 안긴다. 30인 오케스트라 편성은 극의 무게감을 극대화한다.
인터미션 10여분을 제외하고 러닝타임이 약 3시간에 육박한다. 무거운 내용인지라 그 만큼 관람이 쉽지 않다. 하지만 이 연극에서는 당연하다. 일종의 제의에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종군 사진기자, 파힘, 말락, 샴세딘을 연기하는 남명렬을 비롯해 이윤재, 전박찬 등은 1인 다역을 한다. 시몽과 잔느는 김주완, 이진희가 맡았다. 번역자 최준호씨가 1차 번역을 한 극본을 한국어의 말맛을 잘 살려낸다는 평을 받는 극작가 배삼식씨가 다듬었다.
'그을린 사랑'의 불어 대본 원제는 '엥셍디(Incendies)'다. 화재, 붉은 광채, 감정의 고조나 폭발 등을 뜻한다. 7월1일까지 명동예술극장에서 볼 수 있다. 2만~5만원. 1644-2003
제의라는 연극의 기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