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평생 돈 버는 재주 없이 살았고, 돈 바란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 큰 학교를 옮기려고 보니 돈이 너무 많이 드네요. 건축비는 고사하고 터 닦는 데만 15억원이 든다고 합니다. 내 평생 처음으로 '누군가 금전적으로 도와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새마을운동의 모태가 된 경기도 하남시 가나안농군학교. 지난 8일 오후 학교에서 만난 김평일(70) 교장은 창립 50주년을 맞아 경기도 양평으로 학교를 옮기는 소감을 묻자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고(故) 김용기 장로)가 살아계실 때, 박정희 대통령이 찾아와 '내가 뭘 도와드릴까요?' 하니 아버지는 '그저 안 도와주는 게 도와주는 겁니다'라며 거절했습니다. 그 정신을 잊지 않고 지키려 했지만 지금으로선 어쩔 수가 없네요."

경기도 하남시 풍산동 산 52-2번지. 농장과 대지를 합쳐 총 4만㎡(1만2000평) 규모의 땅은 1962년부터 농군학교의 터전이었다. 번지 앞에 산(山) 자가 붙었지만 나지막한 평지에 자리 잡고 있었다. 김용기 장로와 김 교장이 대를 이어 야산을 50년간 가꿔왔기 때문이다.

지난 8일 오후 경기도 하남시 풍산동 가나안농군학교에서 김평일 교장이 학교의 상징이나 마찬가지인‘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마라’는 표지석 앞에서 학교의 역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학교 부지가 2009년 정부 시책에 따라 보금자리주택지구에 포함돼 학교를 옮기게 됐지만, 토지 보상금이 턱없이 적었다. 산 번지인 데다 그린벨트로 묶여 있던 탓이다. 경기도 양평에 새 부지로 6만6000㎡(2만평)짜리 야산을 사고 나니 남는 돈이 없었다. 그는 "지난 3월까지 땅을 비워달라고 했는데 올해 말까지로 미뤄 버티고 있다. 국가에서 하는 일이니 따르겠지만, 돈이 없어 새 부지에 교육관·농장·식당·생활관 등을 짓지 못해 도저히 못 옮긴다"고 말했다.

가나안농군학교는 1954년 고 김용기 장로가 야산을 개간해 만든 농장에서 시작됐다. 농장의 수확량이 늘자 인근 주민들과 공무원이 농사법을 배워갔다. 체계적으로 농민교육을 하기 위해 1962년 농군학교를 세웠다. 그해 박정희 대통령이 찾아와 "국민과 우리나라가 잘살게 하는 게 내 목표인데, 김 선생이 벌써 이뤘다"고 했다. 1960년대 중반 한 달간 총리실 사람들이 농군학교에 파견됐다. '하면 된다' '가난을 싸워 이겨야 한다' 등 농군학교에서 쓰던 말이 1970년 시작된 새마을운동의 구호가 됐다. 새벽 5시에 울리는 농군학교의 '개척종(鐘)'은 "새벽종이 울렸네"로 시작하는 노래가 됐다.

이후 50년간 고 정세영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 김재철 동원그룹 회장의 두 딸, 박근혜·이재오 의원 등 정치인과 경제인, 연예인, 직장인, 학생 등 7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농군학교에서 3~15일간 머물며 교육을 받았다. 태국·우간다 등 외국 관리들도 찾아왔다.

김 교장은 "처음 학교를 옮겨야 한다고 했을 때 너무 화가 나 이마에 빨간 띠 두르고 청와대 앞에 갈 마음까지 먹었다"고 했다. 이후 3년간 곳곳을 찾아다니며 '역사적 장소이니 철거하지 않게 도와달라'고 탄원했지만 소용없었다. 수십년간 얼굴 보며 살던 동네 사람들도 보상금을 받고 하나 둘 떠났다. 그는 "이웃도 없이 우리만 덩그러니 남아서 뭐 하겠느냐"며 흙벽돌 쌓아 지은 학교 건물과 교회를 유적지로 남기는 조건으로 학교 터를 옮기기로 했다.

그는 "양평 시대가 열리면 제2전성기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