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상품 패키지에 쇼 포함, 아이가 아슬아슬 공중회전…불붙은 촛대 입에 물기도

"내 아이가 이런 공연하면박수칠 수 있겠나"
市에 공연 중지 진정서도

지난달 제주도로 가족여행을 간 염모(24)씨는 서귀포의 한 공연장에서 관람한 서커스쇼를 떠올리면 마음이 편치 않다. 패키지 여행상품에 포함돼 있던 중국 곡예단의 서커스쇼는 화려하고 박진감이 넘쳤다. 그러나 공연이 주는 흥분은 오래가지 않았다. 유치원생 정도밖에 돼 보이지 않는 어린 아이들이 성인 곡예사 위에 올라가 아슬아슬하게 공중회전을 하고, 물구나무를 서 180도 다리를 찢었다. 상체를 활처럼 구부린 채로 불이 붙은 촛대를 입에 물고 있는 아이의 모습이 애처롭게 보였다. 염씨는 "대여섯살도 안 돼 보이는 중국 아이들의 곡예를 보며 같은 또래인 조카 생각이 났다"고 했다.

'어린 나이에 서커스단에 들어가 온갖 고생을 하다 가까스로 탈출했다'는 아동 곡예사들의 이야기가 신문지상에 마지막으로 오르내린 지 20여년이 지났다. 한국에서는 더 이상 아동 곡예사를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 제주도 서커스 공연장엔 중국에서 온 어린 곡예사들이 상시 공연을 하고 있다.

서커스단 관계자에 따르면 현재 제주에서 상설 공연을 하고 있는 중국 서커스 곡예단원 35명 중 12명이 15세 미만의 아동·청소년이다. 곡예단은 하루 3회 공연을 한다. 1회 공연시간은 1시간 정도다. 다른 곡예사의 목말을 타고 올라가 작은 장구처럼 생긴 나무토막을 긴 줄로 굴리는 공죽 공연, 비단천을 몸에 감고 공중회전을 하는 비단천 공연, 사지(四肢)와 입으로 각각 촛대를 들고 균형을 유지하며 몸의 유연성을 보여주는 요가 공연 등으로 구성돼 있다. 어린 곡예사들은 학교에 가지 않는다.

인간 육체의 유연성과 기민성을 최대로 끌어내야 하는 서커스. 그만큼 고도의 훈련을 요구하는 공연이다. 특히 어린 아이들에겐 더욱 그렇다.

국제노동기구(ILO) 협정 182조 '최악의 아동노동금지 협정'에 따르면 서커스는 위험한 노동(hazardous work)에 해당돼 18세 미만의 아동·청소년은 곡예사로 나설 수 없다. 한국 역시 1999년 이 협정을 비준했다. 아이들이 위험천만한 곡예를 펼치는 서커스는 중국·북한 등 일부 국가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

서커스를 관람한 관광객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지금까지 본 서커스 중 가장 스펙터클했다', '중국에서도 인정받는 기예단원들이 실수 하나 없이 펼치는 숨 막히는 쇼를 제주에서 볼 수 있어 좋았다'는 관람평도 있었다.

어린아이들에게 위험한 공연을 시키는 것은 잘못이라는 입장도 있었다. 공연을 관람한 한 관객은 "자신이 선택해서 서커스를 하는 성인들과 그렇지 않은 아이들은 다르다"며 "만약 내 아이가 이런 공연을 한다면 박수를 칠 수 있겠느냐"고 했다. 한 관람객은 올해 초 서귀포시에 '비인권적인 공연을 중지해 달라'고 진정을 제기하기도 했다. 서커스단 관계자는 "(어린아이들이 공연하는 것에 대해) 불편해 하는 관객은 전체 관람객 중 30% 정도"라고 했다.

아동·청소년 문제 전문가들은 외국 어린이들의 공연이지만 국내법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 김기헌 연구위원은 "문화예술 분야의 경우 어린이도 취업인허증을 받으면 일을 할 수 있지만, 신체에 위해가 갈 수 있는 등 위험한 일은 규제를 받을 수 있다"고 했다. 김가람 노무사는 "아동 서커스는 국제협약은 물론 아동복지법, 근로기준법 모두 문제가 될 소지가 있다"며 "중국 아이들이라고 해도 국내에 와서 일하는 이상 국내법의 적용을 받는다"고 설명했다. 그는 "(아동노동을 제대로 감독하지 못한) 국가도 문제가 될 수 있다"고 했다.

서커스단 관계자는 "중국 현지의 공연단과 보통 1년 단위로 계약을 맺는데, 이번에 온 공연단에 유독 어린 곡예사가 많이 포함됐다"고 했다. 그는 "한국에선 어린아이가 서커스 공연을 하는 것이 문제가 있다고 보지만, 중국에선 아이들의 취직·교육 문제를 해결해 줘 서커스단에 많이 보내는 편"이라고 했다. 학교에 가진 않지만 중국에서 온 선생님한테 기본적인 교육을 받고 있고, 일주일에 2~3번 외부에 나가 쇼핑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공연을 관람한 이모(35)씨는 "제주도는 다양한 관광자원을 갖추고 있는 곳인데, 제주도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서커스를 관광상품으로 만들고 거기에 외국 어린이들을 불러 돈벌이의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다"며 "외국 관광객들이 이 서커스를 본다면 한국을 인권 후진국으로 인식하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