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7년(중종 32) 겨울 권신 김안로가 쫓겨나자, 국정 쇄신과 조정 개편에 향한 기대는 한껏 부풀었다. 기묘사화와 권신정치로 물러난 사림세력이 복직하고, 신진기예도 적지 않게 수혈되었다. 이때 호남에서는 이만영(李萬榮)·윤복(尹復)·유희춘·김인후 등이 새로 문과에 들었다.

이렇듯 정치환경이 변하면서 새 정치를 바라던 인사들이 도성에 모일 때, 홀연히 전라도 태인으로 내려온 선비가 있었다. 개국공신을 배출하고 문과 급제자가 상당하였던 명가 출신 이항(李恒·1499∼1576)이었다. 본관은 성주(星州).

이항은 젊은 시절 용맹한 협객이었다. 씨름과 궁마(弓馬)는 근기 일대에서는 다툴 자가 없었다. 완력으로 스님들을 겁박하고 사찰을 접수한 험상궂은 사이비 중을 패대기쳐서 저승으로 보낸 일도 있었다. 오로지 무과로 발신할 생각이었다.

호조 판서를 지낸 백부의 꾸지람은 항상 매서웠다. 그러던 20대 후반 이웃집 벽에 걸린 주자의 '십훈(十訓)'과 '백록동규(白鹿洞規)'를 보았다. 주인의 설명, "기묘학자의 공부 과정이었다." 어린 시절 길에서 마주친 김정(金淨)이 '대학(大學)'을 들고 김식(金湜)을 찾아가는 광경이 새삼 스쳤다. 충격은 깊었다. 단호히 무술을 일삼던 동아리를 사절하였다. "생애를 거의 놓칠 뻔했구나!"

남고서원(南皐書院) 전경. 이항을 모신 전북 정읍시 북면 보림리 서원. 이항은 시조‘태산가(泰山歌)’를 휴게 중에 부르며 쉼 없이 정진하였다.“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스스로 오르련만, 제 아니 오르고서 뫼만 높다 하더라.”이항의 선조로 고려 후기 명신인 이조년(李兆年) 또한‘다정가(多情歌)’로 유명하다.“ 이화(梨花)에 월백(月白)하고 은한(銀漢)이 삼경(三更)인 제, 일지춘심(一枝春心)을 자규(子規)야 알랴마는, 다정(多情)도 병인 양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

기묘학자들이 소중하게 여겼던 '대학'은 무엇인가? 깊이 파고들었다. 도봉산 암자에서 읽고 또 읽었다. 말을 타고서도 여관에 들어서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경상도 선산으로 박영(朴英)을 찾았다. 저명한 무신으로 혁신정치에 투신하여 파직당한 무인사림(武人士林)이었다. '대학'의 독법을 일목요연하게 '대학도(大學圖)'에 그렸는데, 천문·지리·의약에도 밝았다.

만물의 생성과 변화의 이치를 알고자 역학(易學)에도 골몰하였다. 두문불출 '주역'을 연구한 윤정(尹鼎)에게 배웠다. 조정이 벼슬을 내리자 머나먼 절로 몸을 숨긴 처사학인이었다. 이때 왕족으로 서경덕에게 배운 이구(李球)나 민기(閔箕)·나식(羅湜)과 사귀었다.

그런데 살림이 어긋나며 빚은 쌓여갔다. 제사나 가족 부양도 곤란하였다. 결국 노모를 모시고 태인으로 내려왔다. 선조의 묘소가 있고 여기에 딸린 농토가 있었다. 1538년 봄 마흔이었다. 노복을 데리고 직접 농사를 지었다. 항상 서책을 끼고 들판에 나갔다. 더구나 무척 부지런한 측실은 화식(貨殖)에도 재간이 있었다. 살림은 다시 폈고 묵은 빚도 갚았다. 아우의 식솔까지 불러들였다.

이렇게 몇 년, 집안이 안정되자 수양 공간으로 십리 남짓한 보림산 자락에 정사(精舍)를 짓고 '일재(一齋)'로 편액하였다. 공자의 '일이관지(一以貫之)' 즉 충서(忠恕)를 새겼음이 틀림없다. 충서는 진심과 관용이다.

어느덧 후학들이 찾아왔다. 거듭 공부란 스스로 얻어가는 자득(自得)이 중요함을 강조하였다. "동지를 따르기보다는 단칸방에 단정히 앉아 채찍질하고 담금질하는 것이 낫다."

그러던 1543년 여름 뜻밖의 손님이 하인도 없이 찾아왔다. 전라감사 송인수(宋麟壽)였다. 김안로와 대결하다가 유배 살고 조정에 복귀한 중진사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