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부터 베토벤의 편지 3000여쪽과 관련 서적을 모두 구해 읽으면서 작곡가의 삶과 음악에 미쳐 있었어요. 마치 저 자신보다 베토벤을 더 잘 아는 느낌이었지요."
최근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전곡 음반을 발표한 피아니스트 임현정(26)은 올해 세계 음악계에 세 가지 미스터리를 한꺼번에 몰고 왔다. 세계무대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신인 피아니스트이지만 영국 굴지의 명문 음반사와 계약했고, 그것도 다른 음반사에 인수를 앞둔 EMI가 음반 시장의 불황에도 과감하게 투자를 감행했으며, 데뷔 음반으로 낱장이 아니라 동시에 CD 8장을 쏟아낸 것이다. 세계 음반 역사에서 신인 연주자가 베토벤 소나타 전곡을 데뷔 음반으로 내놓은 것은 사실상 이번이 처음이다. 28일 서울 신사동 클래식 음반점 풍월당과 29일 서울 삼성동 야마하 콘서트 살롱에서 연이틀 열린 쇼케이스(새 앨범 발표회)를 통해 그가 국내 무대에 첫선을 보였다.
임현정은 중학교 1학년 2학기 때인 13세에 홀로 프랑스로 건너가 루앙 음악원과 파리 국립 고등음악원에서 공부했다. 2009년 스위스 바젤에서 연주한 '왕벌의 비행'이 인터넷 동영상 사이트 유튜브에서 25만 건에 이르는 조회 수를 기록하면서 화제를 모았다. 그는 "한국·미국·중국 등 세계 어디에 있든지, 돈이 있든 없든지 음악을 듣고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유튜브는 클래식 음악의 '38선'을 무너뜨리고 민주주의를 가져왔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틀간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8번 '비창'에서 임현정은 간간이 양손을 허공으로 들어 올렸다가 그대로 내리찍듯 건반으로 가져가며 강력한 터치를 선보였다. 간혹 정확성이나 섬세함을 다소 희생하더라도 빠른 템포로 쉴 새 없이 몰아치는 패기는 인상적이었다. 좋게 말해 대담하고 개성적이었고, 나쁘게 보면 다소 자의적이었다.
작년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열렸던 독주회를 EMI 음반사 사장이 참관한 후 당시 연주곡이었던 라벨과 스크랴빈을 첫 음반 수록곡으로 제안했다. 하지만 임현정은 그 자리에서 '피아노의 신약성서'로 불리는 베토벤 소나타 전곡을 대담하게 내세웠다. 그는 "내게 베토벤은 '저주받은 천재'를 상징했다. 보석 같은 그의 음악들이 중·고교 입시 곡이나 콩쿠르 연주곡으로만 인식되는 것 같아 때로는 안타까웠다"고 말했다.
베토벤 소나타 32곡 가운데 상대적으로 연주시간이 짧은 두 곡을 뺀 30곡을 연주한 이번 음반에서도 그는 '영웅'과 '영원한 여성성과 청춘' '자연' '운명' 등 8개의 테마로 소나타들을 분류했고, 직접 해설까지 썼다. 임현정은 "내게는 30명의 아이 같은 소나타이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맡길 수 없었다"고 했다. 연주 못지않게 속사포처럼 빠르게 말을 쏟아낸 그는 "이런 과정을 통해 저 자신보다 베토벤을 더 잘 아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이 음반 발표 직후 그는 미국·일본 등에서 쇼케이스로 이름을 알리고 있다. 해외 평단에서는 "잃어버린 열정과 연인을 향한 욕망을 되찾아주는 비아그라와 같다"(영국 텔레그래프)는 호평과 "스스로 위험을 무릅쓰는 것 같다"(영국 그라모폰)는 유보적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 그의 국내 독주회 일정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하지만 29일 쇼케이스에는 국내 공연 기획사와 공연장, 교향악단 관계자 100여 명이 참관해 높은 관심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