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 같은 제목의 영화를 누가 만든 걸까. 아마도 이 영화를 보게 된 건 제목 때문이었던 것 같다. '거북이'는 왜 등장하고, '의외로'라는 말은 어떤 말에 반응하며, '빨리' 헤엄친다는 말이 의미하는 건 뭘까. 이런 걸 꽤나 궁금해하던 여름이었다. 수박을 먹다가 수박씨가 목에 걸려 결국 알약처럼 꿀꺽 삼켜버렸던 8월.

존재감이 거의 없이 평범한 삶을 살고 있는 주부 스즈메(스즈메는 '참새'라는 뜻). 그녀는 자신보다 애완용 거북에게 더 관심을 쏟는 남편과 하품 나게 단순한 일상을 보내던 어느 날, 누구라도 그냥 지나칠 법한 새끼손톱만 한 '스파이 모집' 광고를 발견한다.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 평범함에서 탈피하고 싶었던 그녀는 모집 광고 속 번호로 전화를 건다. 그때 그녀 앞에 나타난 스파이는 '어느 나라'의 스파이라고 주장하는 구기타니 부부. 그들은 스즈메 같은 존재감 없는 사람이야말로 스파이를 해야 한다고 설득한다.

네온사인으로 뒤덮인 도쿄의 신주쿠 거리. 존재감 없이 살아가는 영화 속 인물들은 영화 배경인 도쿄뿐만 아니라 우리 주변 어디에나 있을지도 모른다.

졸지에 스파이 활동 자금 500만엔을 건네받은 스즈메는 스파이 교육을 받기 시작하면서 자기가 몰랐던 '어중간한 척하며 사는 세상의 스파이'들을 발견하게 된다. 가령 이들은 예상과는 다르게 두부 가게 옆 모나카 가게 주인이거나, 오랫동안 라멘만 끓인 라멘집 주인이다. 하지만 라멘집인데도 정작 라멘은 맛이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없는 어중간한 맛이고, 오히려 후식으로 주는 에스프레소가 더 맛있는 식이다. 분명 이발소처럼 생겼으나 미용실인 영구 파마집 주인 역시 스파이로 활동 중인 어중간한 사람. 맛집처럼 유명한 곳이 아니라 어쩌다가 들렀는데, 그럭저럭 어중간한 맛이나 서비스로 존재하는 평범한 가게들인 것이다. 스파이의 조건은 어쨌든 절대로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것이니까.

우에노 주리가 맡은 스즈메의 면면을 살펴보면, 가장 친한 친구인 구자쿠는 오래전부터 그녀와 한 약속을 잊거나 2시간 이상 늦는다. 옆에 버젓이 서 있는데도 사람들이 방귀를 뿡 뀌고 지나간다거나, 화장실에서 손을 씻고 있는데도 모른 척 버젓이 들어온다거나, 버스마저 정류장에 서 있는 그녀를 보지 못하고 그냥 지나가 버린다. 이토록 존재감이 미미한 사람이라면 계단 100개 밑에서 젖은 낙엽처럼 딱 붙어 있는 손톱만 한 스파이 광고를 발견할 수도 있는 것이다. 계란이 아니라 메추리알을 가지고 '메추리알 프라이'를 만들어 먹거나.

그즈음, 나는 존재감이 워낙 없어서 자신이 어떤 사람일지 고민하는 여자의 짝사랑 이야기를 쓰고 있었다. 그 여자 입에서 나온 최초의 고백은 "이정우는 삼 년째 나를 '김하나'라고 부른다. 내 이름은 김한아다. 짝사랑이란 늘 이 모양인 것이다" 하는 자기 푸념이다.

"가끔 내가 그렇게 눈에 띄지 않는 사람일까 고민한 적도 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4년을 함께 일한 최 과장조차 내 이름을 종종 '하나'라고 잘못 쓰곤 했다. 엄마는 딸 이름을 '한아'라고 지어놓고도 자주 내 이름을 '하나'로 착각하곤 했다. 동생인 '둘'은 처음부터 내 이름이 '하나'일 거라고 믿었다. 하나 그리고 둘. 동생에겐 '한아'란 이름은 존재할 수도, 존재해서도 안 되는 이름이었다. 둘 이전엔 무조건 하나만 존재했다. '한아'가 아니라! 그것이야말로 여섯 살짜리가 생각할 수 있는,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작명법이었다." 이 소설의 주인공 역시 '스파이'처럼 자기가 좋아하는 남자의 영수증을 모으며 그 남자의 일상을 탐구한다.

나는 이런 사람을 꽤나 많이 봐 왔다. 영화 배경인 도쿄가 아니라 서울 어디에도 이런 학생은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존재한다. 사실 그곳이 도쿄가 아니라, 시골이나 어느 중소 도시라고 해도 그런 외로운 아이들은 어디에나 있다. 돌이켜보면 나 역시 딱히 눈에 띄지 않는 있으나마나한 그런 학생이었으니까.

언젠가 '무한도전'의 김태호 PD가 무한도전의 새로운 아이템으로 '돌아이 콘테스트'에 대해 얘기하는 걸 보다가 무릎을 치며 웃었다. "돌아이 콘테스트는 '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는 영화처럼 누가 보기에도 평범한 학생, 평범한 회사원인데 알고 보면 '또라이'인 사람들을 생각한 거예요. 멀쩡히 지내다가 어느 날 하늘에서 '또라이' 마크가 뜨고 홍철이가 드디어 우리가 활약할 때가 됐다고 선언하면 '나는 돌아이야!' 하면서 집결하는 거죠!" 생각만 해도 웃음이 터져 나왔다. 세계 어느 도시에나 분명 스즈메 같은 엉뚱한 스파이가 존재하고, 그들이 다름 아닌 푸른 별 '지구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보이지 않게 동분서주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어쩐지 힘이 되기 때문이다.

믿거나 말거나, 한때 나는 밤마다 지구를 구하는 꿈을 꾼 적이 있다. 매일 마감을 어기고 원고를 못 쓴다고 구박만 받는 평범한 잡지사 기자로 일하던 백영옥. 그녀가 하기 싫은 야근을 거듭하다 퇴근을 하면, 누군가 버튼을 눌러 출동 명령을 한다. 출동 명령에 따라 우주선을 탈 때마다 나는 지구인의 평화를 위해 복무한다는 사명감에 짐짓 비장해지곤 했다. 나의 지구 구하기 프로젝트는 한 달이나 지속되었다. 시리즈로 개꿈을 꿔 본 사람은 내 말이 어떤 뜻인지 알 수도 있을 거다.

'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를 보다가 잊고 있었던 그 꿈을 생각했다. 내 평생 아마 그렇게 황당한 꿈은 다시 꿀 것 같진 않다. 하지만 꿈을 떠올리는 순간, '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가 의미하는 바를 깨달았다. 평범한 일상에도 아직 우리가 알지 못하는 세계가 있고, 눈을 크게 뜨고 그것을 발견하면 삶이 훨씬 더 즐겁고 명랑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어느 날, 문득 어중간하게 생긴 누군가가 내게 '지구를 구하는 귀여운 스파이' 강령을 내린다면 나는 아마도 덥석 그것을 수락할 것 같다.

●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 버라이어티 구성 작가 출신인 '미키 사토시' 감독 작품. 우에노 주리가 '스즈메' 역을, 아오이 유우가 스즈메의 친구인 '구자쿠' 역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