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헌

조선시대 귀족, 즉 돈 있는 양반들은 집을 세 채 정도 갖고 있어야 행세를 하였다. 우선 서울에는 경택(京宅)이 있었다. 경저(京邸)라고도 한다. 핵심 벼슬을 하려면 궁궐이 있는 서울에 거주했어야 하기 때문에 서울에 집을 가지고 있어야 했던 것이다. 경택은 공직을 수행하기 위한 공간이었다. 집 크기는 보통 30~50칸 정도의 규모가 많았다.

지방에도 집이 하나 있었다. 주로 자기 고향에 있는 집이었는데, 이를 향제(鄕第)라고 불렀다. '제(第)'는 집이라는 뜻이 있다. 조상,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집이 많았다. 벼슬에서 물러나면 서울을 떠나 이 '향제'로 되돌아갔다. 낙향하면 사는 집이었다. 또 하나의 집은 별서(別墅)였다. 별업(別業)이라고도 불렀다. 말하자면 별장인데, 산자락에 위치하면서 계곡물이 흐르는 곳에다가 아담한 규모의 정자와 함께 숙소가 딸려 있는 집이었다.

벼슬할 때는 경택에 머물고, 벼슬 끝나서는 향제에 살고, 머리 아플 때는 별서에 가서 쉬었다. 담양의 소쇄원(瀟灑園)이 우리나라 '별서'의 대표적인 형태이다. 하지만 소쇄원은 정자 하나에다 숙소 딸려 있는 조그만 규모의 별서가 아니다. 규모가 있는 장급(莊級) 별서라고 보아야 한다. 양산보(梁山甫·1503~1557)가 한양의 벼슬을 아예 단념하고 무등산 자락에 평생 눌러 살 것을 결심하고 조성한 정원이기 때문이다. 소쇄원보다 좀 더 규모를 갖춘 장원은 강릉의 선교장(船橋莊)이다. 경포대 호수와 소나무숲, 연꽃이 어우러진 장원(莊園)이었다. 서울에서는 인왕산 자락인 청풍계(淸風溪) 일대가 모두 장동김씨들의 장원이었다. 중국의 경우를 보면 시불(詩佛) 왕유(王維·699~759)가 종남산 기슭에다가 지은 '망천장(輞川莊)'이나 명대 왕헌신(王獻臣)이 지은 소주의 졸정원(拙政園)이 이러한 장원의 전형에 해당한다.

조선이 망한 1910년 이후로 서울시내에는 왕조시대의 건축 제한이 풀려서 자유롭게 저택을 지을 수 있게 되었다. 시내 중심가에 경택의 편리성과 별서의 산속 같은 분위기를 합친 규모의 집들이 들어섰는데, 끝에는 '장(莊)'자가 붙었다. 이승만의 돈암장, 이화장, 김구의 경교장, 박헌영의 혜화장, 김규식의 삼청장이다. '아름지기재단'의 소유로 있다가 청와대에서 사들인 삼청장(三淸莊)은 이 시기의 장급 저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