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오웰

고세훈 지음|한길사|632쪽|2만4000원

20세기를 말하며 그의 이름을 피해가기란 어렵다. 잉글랜드의 수호 성인 '조지'와, 그가 즐겨 찾던 강 이름 '오웰'을 합쳐 필명으로 삼았던 꺽다리 작가. 대표작 '동물농장'과 '1984'는 고전 목록에 빠지지 않는다. '1984'에 처음 등장한 '빅 브라더(Big Brother)', 2차대전 직후 칼럼에서 그가 처음 쓴 '냉전(cold war)'이란 단어는 지금도 애용되는 시사용어. 그의 이름에서 파생된 '오웰리안(Orwellian)은 '전체주의적인'이란 뜻으로 사전에도 오르면서, 스스로 뜨거운 상징이 됐다. 제국주의·전체주의·사회주의라는 거대 이념의 광풍이 거세던 시기, 그는 '보통사람'의 도덕적 잣대로 정통과 주류의 위선에 맞선 진정한 휘슬블로우어였다.

◇속죄와 해원에서 출발한 글쓰기

출발은 '속죄와 해원'이었다. 어릴 적 아프게 겪은 빈부차와 소외감, 청년 시절 제국의 경찰 체험에서 나온 죄의식이었다. 그는 인도 거주 영국인 부모 밑에서 났다. 부친은 아편국 하급관리였다. 오웰 표현대로라면 '하위중상계급(lower-upper-middle class)'. 엄마 치맛바람에 밀려, 신흥부자 자녀들이 가는 세인트 시프리언스 예비학교(초등학교)에 입학한 게 화근이었다. "아빠 연봉이 얼만데." 아이들은 심문관처럼 물었고, 가위눌린 꼬마 오웰은 밤에 오줌을 쌌다. 사립명문인 이튼스쿨에 장학생으로 진학해서도 계급적 소외감은 이어졌다. 졸업 후 통상적 수순인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 진학을 접고 이듬해 버마에 있는 영국제국 경찰국에 지원했다. 하지만 5년 임기가 차기 전 사표를 썼다. "나는 억압적 체제의 일부였고 이는 내 양심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 내가 속죄해야 할 엄청난 죄의 무게를 느꼈다."(위건 부두로 가는 길)

◇한없이 아래로 내려가다

버마를 떠나 온 뒤 밑바닥 삶을 자처했다. 파리 호텔 식당의 접시닦이를 하고 런던 템스강 부랑아들과 노숙했다. 1931년 성탄절 직전엔 구치소에 들어가려고 빈속에 위스키를 병째 마시고 경찰 앞에서 쓰러지기도 했다. 그 결과가 2년 뒤 첫 소설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이었다. 이어 잉글랜드 북부 탄광촌 체험을 토대로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을 썼다. 그건 사회주의자로서의 선언문이기도 했다. 1936년 12월 스페인 내전 때는 혁명전사로 뛰어들었다. 결혼한 지 6개월 만이었다. 이곳에서 그는 공산주의자들의 패권주의에 눈뜨게 된다. 공산당은 전체주의 정당으로 변했고, 중상과 청산을 통한 '이단' 제거에 골몰해 있었다. 이때 경험은 소련체제와 이를 감싸던 좌파지식인들에 대한 불신과 혐오를 낳았다. 그는 좌파였지만 좌파의 이율배반을 누구보다 못 견뎌 했다.

◇사회주의의 힘은 이데올로기가 아닌 도덕성

저자는 오웰의 지향점이 '품위(decency) 사회주의'였다고 말한다. 사회경제적 구조혁명을 바라되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주요 가치를 버리지 않았다. 자본주의의 전면적 변혁을 꿈꿨지만 혁명 자체가 진정한 진보를 가져오리라고 보지도 않았다. 그에게 사회주의 운동의 참 동력이란 경제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윤리였다.

말년에 그는 자신이 염원했던 것이 "정치적 글쓰기를 하나의 예술로 만드는 것"이라고 썼다. 하지만 작가가 직접 정치에 개입하는 순간 선전자로 전락한다고 믿었다. "정서적으로 나는 분명 좌파이지만 작가는 정당 이름에서 자유로울 때만이 정직하게 남을 수 있다고 믿는다."

그는 글쓰기에서도 진실·사실과의 정직한 대면을 위한 노력에 치열했다. 혹독한 밑바닥 삶을 겪고 나서야 그 경험들이 문학의 자양분이 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삶이 먼저였고 글쓰기는 연장이었다. 당대 유명 작가인 장 폴 사르트르와 아서 쾨슬러의 최신작을 평하면서도 "통상의 시공간을 벗어난, 현실 가능성을 떠난 상상의 세계 혹은 먼 과거"를 그리고 있기 때문에 평할 의욕조차 나지 않는다고 했다.

◇"글과 삶이 일치했던 정직한 작가"

내내 가난과 폐병에 시달리던 그는 죽기 5년 전에 나온 '동물농장'이 잘 팔리면서 비로소 경제적 여유를 얻었다. 하지만 건강은 내리막길이었다. 1946년 5월 대표작 '1984'를 완성하던 무렵 이런 글을 썼다. "많은 경우 창작의 열정은 대략 15년 정도 지속되는 것 같다. 소설가에게 30~45세일 것이다. (…) 합리적 사회라면, 자기가 할 말을 끝낸 작가는 이제 다른 직업을 택해야 할 터이지만, 경쟁적 사회에서 그는, 정치인이 꼭 그렇듯이, 은퇴는 죽음이라고 느낀다. 그래서 열정이 소진되고 오랜 시간이 지나도 쓰는 일을 지속한다."

3년 후 그는 병원에서 피를 토하고 숨을 거뒀다. 47세였다. 죽기 사흘 전 작성된 유서에 적힌 주문은 세 가지. '전기를 쓰지 말라. 화장(火葬)은 싫다. 장례는 영국국교회식으로.' 유언에 따른 그의 비문은 단출하다. "에릭 아서 블레어 여기 눕다. 1903년 6월 25일 출생, 1950년 1월 21일 사망." 그는 생전에 내세의 천국과 지옥을 논하는 크리스천과 교회에 비판적이었지만 죽기 직전엔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이 더 이상 신을 믿지 않는다면 과연 이제 어떻게 서로에게 품위 있게 행동하도록 만들 수 있을 것인가."

오웰의 친구이자 전기작가였던 조지 우드콕은 "그가 영문학계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한 것은 그가 쓴 글뿐만 아니라 그의 인간과 삶 그리고 그가 평생 옹호했던 근원적인 정직성 때문이다. 나는 살아온 인간과 글로 표현된 인간의 모습이 이처럼 일치하는 작가를 결코 만난 적이 없다"고 썼다. 저자는 '오웰이 쓴 지금까지 알려진 거의 모든 1차 자료에 대한 반복된 독서'를 바탕으로 했다고 쓴다. 꼼꼼한 오웰 읽기의 자취가 역력하다. 다만 주제별로 쓴 장(章)들이 서로 겹치는 대목이 적잖다. 술술 읽히는 전기라기보다 찬찬히 음미해야 할 분석서에 가깝다.

조지 오월 대표 저서

동물농장

이 책의 탈고는 1944년 2월이었지만 출간은 45년 8월 17일이었다. 영미 정부와 출판사가 스탈린을 의식해 출판을 꺼린 것. 소련공산체제에 대한 풍자가 노골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오웰은 친구한테 200파운드를 꾸어 자비 출판까지 궁리했다. 실제 오웰은 동물을 사랑했다. 집에서 기르는 수탉 이름은 헨리 포드, 염소는 뮤리엘, 검은 푸들은 마르크스….

1984

무라카미 하루키의 최신작 '1Q84'도 이 책 영향을 받았다. 전체주의 국가에서 개인의 파멸 과정을 그린 디스토피아 소설. 가상 국가인 오세아니아의 런던을 무대로 독재의 화신인 '빅 브라더'에 맞서 분투하는 개인을 소름끼치게 그렸다.

위건 부두로 가는 길

잉글랜드 북부 탄광 체험을 토대로 쓴 르포. '실업을 다룬 세미다큐멘터리의 위대한 고전'이라는 평을 받는다. 1부는 노동계급의 신산한 삶을 담았고, 2부는 당시 좌파 지식인들을 통렬히 비판한다. 청년 작가 오웰의 정치적 사고와 성향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