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파격적인 '보브컷(Bob cut·단발머리에 컷을 넣어 비정형으로 스타일링한 머리)'을 선보여 여성 헤어스타일의 개척자로 우뚝 섰던 세계적 헤어스타일리스트 비달 사순(Vidal Sassoon·84)이 9일 오전(현지시각)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세상을 떠났다.
AP 등 외신은 10일 사순이 LA 멀홀랜드 자택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뒀다고 보도했다. 사순은 1997년 백혈병 진단을 받은 이후 지금까지 투병 중이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1928년 영국 런던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사순은 1960년대 여성 헤어스타일에 '자유'를 선사한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너는 가난하니 커서 미용사가 돼라"는 어머니 조언에 따라 14세 때부터 미용 가위를 잡기 시작한 그는 26세 되던 1954년 런던에 자신의 첫 미용실을 냈다.
사순이 세계적 주목을 받게 된 건 1960년대 초 '혁명적 단발컷'으로 평가받은 '보브컷'을 세계 최초로 선보이면서부터다. 그는 평범한 단발머리를 뜻하는 '보브'에 기하학적인 '커팅'을 넣어 '보브컷'을 탄생시켰다. 비달 사순이 창조한 스타일이라 해서 '사순컷(Sassoon cut)'으로도 불린다. 당시 여성들의 머리는 파마한 긴 머리를 우아하게 틀어올리는 천편일률적 스타일이었다. 여성들은 화장대 앞에 앉아 뜨거운 헤어롤러(머리를 구불거리게 하는 도구)와 컬핀(머리를 말아올리는 핀)을 들고 오랫동안 씨름해야 했다. 하지만 사순은 보브컷 하나로 '머리만 감으면 바로 외출해도 되는 세련된 머리스타일'을 창조해 여성들을 롤러와 컬핀으로부터 해방시켰다. 사순은 1993년 LA타임스 인터뷰에서 "당시 여성들은 일터로 모이고 있었다. 바빠서 아무도 드라이어 밑에 앉아 시간을 보낼 수 없었다"고 했다.
1968년 영화 '로즈마리 베이비'에 출연한 미아 패로, 1969년 '우먼 인 러브'의 주연 글렌다 잭슨 같은 스타들도 사순이 창안한 보브컷으로 은막을 누볐다. 그가 패로의 머리를 스타일링해주며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1회당 5000달러'를 받은 에피소드는 지금까지 전설처럼 전해진다. C컷, V컷, 5포인트컷(뾰족한 부분이 5개 있는 컷) 등 다양한 변형도 내놨다. 이런 성공을 바탕으로 그는 유럽과 미국·일본 등 전 세계에 '비달 사순 헤어살롱'을 내고 유명 헤어디자이너들을 배출했다. 그의 이름을 딴 샴푸, 헤어스타일링 기구도 시장에서 인기를 얻었다.
화려한 삶 뒤에는 질곡도 많았다. 그리스계 유대인 아버지와 스페인계 유대인 어머니 사이에서 가난하게 자란 사순은 5세 때 부모로부터 버림받았고, 유대인 교회가 운영하는 고아원에서 7년여를 살아야 했다. 자신이 직접 겪은 유대인 차별에 맞서 낮에는 미용사로, 밤에는 유대인 지하조직 멤버로 활동하며 인종차별주의자들과 싸우기도 했다. 스무 살이던 1948년엔 이스라엘군으로 아랍을 상대로 한 1차 중동전쟁에 참전했다. 이런 사건들은 그가 은퇴 후 사재(私財)를 털어 이스라엘 히브루대학에 반(反)유대주의를 연구하는 '비달사순국제연구소'를 설립하는 데 영향을 끼쳤다.
헤어디자이너 정재명 포레스타 대표는 "비달 사순은 두상이나 얼굴 형태에 따라 여성이 얼마나 다양하고 아름답게 변신할 수 있는지 증명한 거장"이라며 "헤어스타일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에게 빚을 졌다고 할 수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