덩치가 큰 5학년 경민(12·가명)이는 늘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아이들이 "뚱뚱하다"고 놀리면 참지 못하고 주먹을 휘둘렀다. 교사들도 "무서운 아이"라며 혀를 찼다.
2007년 서울 정목초등학교에서 경민이 담임을 맡은 김중환(51·현재 서울 등마초등학교) 교사는 경민 어머니로부터 집안 사정을 전해듣고 가슴이 저며왔다. 갑작스러운 사업 실패 때문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힘들어하는 어머니 모습을 경민이가 지켜봐 정서적으로 불안해졌다는 것이다.
김 교사 눈앞에 어린 시절 자기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김 교사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어머니가 숨졌고, 19세 때는 아버지마저 돌아가셨다. 중학교에도 못 간 김 교사는 14세 때부터 제책사에 취직해 책을 만들었다. 21세에 검정고시로 중·고교를 졸업하고, 남들보다 늦은 25세 때 서울교대에 입학해 교사가 됐다.
부모 없이 혼자 힘으로 어렵게 자란 김 교사는 '경민이 아버지가 돼 주겠다'고 마음먹었다. 아이가 분노와 슬픔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싶었다. 곧 여름방학이었다. 뭘 해주면 좋을까 고민했다. 평소 반 아이들에게 "주말에 어디 놀러 갔다 왔니" 하고 물으면 손을 들지 못하는 경민이가 떠올랐다. 김 교사는 여행을 함께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여행 장소 30개를 주고 5개만 고르라고 했다. 경민이가 조용히 말했다. "다 가고 싶어요." 그렇게 김 교사와 경민이 둘만의 여행이 시작됐다.
둘은 여름방학 동안 일요일만 빼고 매일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함께 여행했다. 김 교사는 지하철로 갈 수 있고, 아이가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장소들을 여행지로 골랐다. 금융화폐박물관, 축구박물관, 만화박물관, 경찰박물관에 가 다양한 직업과 꿈을 보여줬고, 남산한옥마을, 경희궁, 역사박물관에 가 체험학습도 했다. 꽃이 많은 여의도공원에 가 꽃을 바라보게 했고, 산에 올라가 네잎클로버를 따줬다. 아이가 "꼭 가보고 싶었다"고 해서 수영장·영화관에도 갔다. 아이에겐 모든 장소가 처음이었다.
길을 걸을 땐 '사랑해송'을 반복해 불렀다. 김 교사가 "나는 경민이가 좋아요.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요. 경민이도 나를 좋아하나 봐요. 나는 경민이를 사랑해요"라고 부르면 경민이도 "나는 선생님이 좋아요…"라고 따라 불렀다. 사랑해송을 1000번 넘게 불렀을 때쯤 여름방학이 끝났다.
변화는 아이 표정에서부터 찾아왔다. 항상 찡그리고 어두웠던 얼굴에 웃음이 돌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경민이 너 선생님하고 여행했다며? 부럽다"고 했다. 경민이가 친구들과 싸우는 게 크게 줄었다. 주변 교사들도 경민이의 변화에 깜짝 놀랐다.
김 교사는 지난달 오랜만에 중3이 된 경민이를 만났다. 경민이는 환하게 웃으며 "레슬링 선수의 꿈을 안고 운동부에서 매일 연습한다"고 했다.
김 교사의 이 스토리는 교총이 지난달까지 진행한 '학생생활지도 수기 공모'의 우수 후보작 중 하나다. 최종 결과는 오는 14일 발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