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최나영 기자] '사랑니', '해피엔드', '모던 보이'의 정지우 감독이 영화 '은교'에서 보여주는 사랑은 욕망하면 안 되는 것을 사랑하는 슬픔을 이야기하고 있다. 70대 노시인과 17세 여고생의 사랑. 과연 정확하게 사랑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인지, 그렇다면 그 사랑은 육체와 정신의 어느 부분에 더 속하는 것인지, 그 복잡한 감정은 영화에서 한 편의 시처럼 은유적이면서도 감성적으로 보는 이의 마음을 파고든다. 화제를 모으는 주인공들의 파격 노출과 정사신에 대한 궁금증에서부터 원작과 영화에 대한 차이, 배우들의 캐스팅 이유까지. '은교'에 대해 궁금한 몇 가지를 정지우 감독에게 직접 들었다.
- 원작 속 주인공들의 복잡한 감정선이 굵직한 하나로 정리된 느낌이다. 간결하면서도 새롭게 첨부된 재치있는 요소들도 인상적인 각색이었다.
▲ 원래 원작 속에서 인상적이고 재미있는 게 많다 보니 버리면 아까운 것들이 꽤 있었다. 그래서 되게 고민이 많았는데 늘 그렇지만, 장편 소설을 영화로 옮기면 결국 한 줌 만큼만 쥐는 거니까. 그 면에서 이야기가 원래 갖고 있었던 기본과 감정을 놓치지 말자고 생각했다. 개별 사건은 달라지더라도 안에 있었던 마음이나 본질적인 마음은 그대로 산 것 같다. 이야기가 은교(김고은), 이적요(박해일), 서지우(김무열)라는 세 꼭지점을 갖고 있는데, 단순히 여자를 놓고 경쟁하는 구도는 아니기 때문에 조금 더 단순하게 정리하는 대신에 원작의 깊이나 느낌, 울림은 놓치지 않으려고 한 것 같다.
- 원작에서 이적요가 새롭게 배우는 '헐'이란 단어가 좀 더 풍부하게 영화에서 살아났더라.
▲ (원작에서 사용된 요즘 언어의) 갯수가 많아지면 젊은 친구들이 자기가 아는 얘기를 또 한 번 설명하는 것이 되고, 그런 언어를 모르는 낯선 분들은 그런 것을 굳이 알아야 되는 것도 부담스러울 거라 생각했다. '헐'이란 단어의 의미가 굉장히 넓게 쓰이더라. '이거 번역을 하면 어떻게 할까?'란 궁금증이 있었다.
- 김고은이란 배우, 첫 눈에 알아봤나?
▲ 고은이는 조명, 촬영, 녹음기사 등 스태프들이 정말 아끼고 예뻐했다. 앞으로도 정말 기대된다. 그녀가 어떤 영화들을 자기의 경력 안에 채워나갈지. 쉽게 허물어지지 않을 것 같다. 단단한 친구이기 때문에. 대부분 신인인 20대 초반 배우들이 최종 리스트에 있었는데, 그 인원을 줄이고 있던 상태에서 오디션 말미에 고은이가 툭 튀어 나왔다. 그리고 순식간에 본인이 그 역할을 딱 쥐었다. 너무 잘 어울렸다. 원작에 묘사된 팔다리가 가늘고 툭 튀어나온 맨들맨들한 이마라든가..고은이가 나오는 첫 장면, 의자에서 졸고 있는 장면은 너무 예뻐서 유쾌했다. 일면 평범한 사람처럼 보이다가도 마음 속에서 감정이 움직이는 순간 확 엄청나게 달라지는 눈빛이 나온다. 영화 속에서도 기이한 눈빛이 뿜어져 나온다. 어느 순간에는 너무 아이처럼 굴다가 또 어느 순간에는 누이같은 모습이 섞여 있다는 게 신기했다.
- 개인적으로 은교와 서지우가 이적요의 오래된 수납장을 두고 몸으로 실랑이 하는 장면이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 젊은 사람 둘이 뭔가 몸으로 실랑이를 하는 모습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적요랑 몸을 밀치고 잡아 끌고 하는 것은, 그런 몸으로 하는 실랑이는 노인하고는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청춘의 두 사람은 그럴 수 있는 거고. 몸이 엇갈리고 부딪히는 장면이 미묘한 긴장감이 만든다고 생각한다. 둘 사이에 아직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음에도. 지금 이 장면에 대한 언급은 아니지만,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 아이를 때리고 도망가는 초등학교 저학년 남자애의 몸이 부딪히는 상태 같은 거다. 몸이 밀고 당기는 부분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이것이 결국 나중에 은교와 서지우의 관계와도 이어진다고 생각했다.
- 원작에서 서지우는 깊은 쌍거풀을 지닌 인물이다. 김무열은 쌍거풀이 없는 눈매가 외모적 매력 중 하나다. 일면 파격 캐스팅인데?
▲ 원작과 똑같은 특징을 지우자 치면 오히려 김무열은 몸이 너무 좋았던 게 고민이었다. 우리들을 분노케 한 망언 중 하나는 김무열이 이번 소설가 역을 위해 근육을 많이 뺏다고 하는 것이었다. 되게 건장한 사람인데 둔해 보이는 사람은 아니다. 영민한 느낌을 주는 사람이고 그 영민함이 불안함으로 이어지길 원했기 때문에 무열씨가 캐릭터에 잘 맞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가 움직이면 다비드 상이 움직이는 것 같다.
- 원작에서의 서지우의 캐릭터가 많이 축약된 것도 사실이다.
▲ 서지우가 조금 더 순수해졌다고 생각한다. 이적요를 괴롭히는, 구체적인 비열함을 갖고 있는 인물이기 보다는 더 순진하고, 그래서 더 인간적으로 가엾은 상태를 만들고 싶었다.
- 크래딧에 박해일의 대역이 3명으로 돼 있더라. 박해일을 캐스팅한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인가?
▲ 모두 합치면 3명 이상이다. 이적요 대본을 전부 리딩을 해 주신 분도 있다. 박해일은, 영화 속 은교 입장에서 봤을 때 호감이 있어야 했다. 노인이든 아니든 그런 호감을 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분장이란 걸 통해서 노인이 되더라도 그 속에 친밀감이나 호감을 만들어줄 수 있어야 했다. 박해일은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만약 그렇지 않은 사람이 이적요 연기를 했을 때, 되게 무서웠을 수도 있다. 멜로드라마는 남녀주인공 둘 사이가 잘 됐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관객들이 갖는 것이다. 관객이 둘이 잘 되서 이뤄지길 바래야 하는 건데, 그런 관점에서 보면 이적요 캐릭터에서 '호감'이란 게 굉장히 중요한 문제였다.
- 만인의 이상형 박해일을 캐스팅한 것은 의도적이었다는 것인가?
▲ (웃음). 언젠가 잡지를 통해 해일 씨한테 질문을 할 기회가 있었다. '짖궂은 질문을 해도 되냐?'라고 내가 물었고, '아이돌 여자스타나 여배우들, 정말 많은 사람이 본인들의 이상형으로 박해일 씨를 꼽는데, 솔직히 누가 꼽았을 때 가장 좋았냐고 물은 적이 있다. 대답은 듣지 못했다.
- '은교와 서지우. 둘 사이의 정사신 수위가 이렇게 높을 필요가 있나?'라는 질문을 던지는 관객들도 있다.
▲ 정말 사실같아 보이는, 이 둘러싼 모든 것이 진짜로 사실 같아 보이고 싶은 마음으로 찍었다. 서지우의 사고 장면도 그렇고, 정사신도 사실 같아 보이는 실제감이 중요했다. 이적요가 보면 마음이 찢어지게 고통스럽기를 바랬고, 살인 미수까지 이어지는 주는 상처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됐다. 그 상처가 실제 손이 베이는 것처럼, 마음이 훅 베이듯이..이적요가 그렇게 느꼈을 것이다.
- 은교가 서지우와 몸을 나누는 것에 대해서도 '왜'라는 궁금증을 갖기도 하는데?
▲ 은교가 이적요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서지우에게 내려갈 때, 왜 내려갔는지 구체적으로 설명을 하는 것은 불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대사 속에 은교가 '내가 예쁜 애인지 몰랐다'라는 말이 있다. 그 자각을 일깨워 준 사람이 서지우다. 서지우가 그 글(영화 속 '은교'라는 단편소설)을 썼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누군가 나를 그렇게 알아봐준다는 것, 나를 아름답고 귀여워해주고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과 함께 하는 순간이 대단히 행복한 시간이 될 것이다. 은교가 정사를 위해 내려갔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어느 순간 순간들이 넘으면서 본인이 돌이켜봤을 때 이해할 수 없을 행동이었을 수도 있다. 은교와 서지우는 엉겁결에 밤을 함께 보낸 남녀가 아침에 서로의 얼굴을 보며 대단히 부끄러운 느낌이 드는 것 같은 기분이었을 수도 있다.
- 원작자 박범신 작가는 영화를 본 소감을 뭐라고 하던가?
▲ 영화를 두 번 보셨다. 첫 VIP 시사회는 시나리오를 안 보신 상태에서 보셨다. 배우들이 첫 영화를 보면 굉장히 흥분한다. 처음보면 눈에 잘 안 들어온다고 하더라. 쉽게 말하면 나만 보이고 사리 분별이 잘 안되고 나를 빼고는 포커스 아웃되는 것이다. 이 생각만 하다보면 어느 새 시간이 훅 간다. 하지만 두 세번째 보면 하나하나 가닥이 보이는데, 박 선생님도 처음에는 배우처럼 굉장히 흥분한 상태로 보셨던 것 같다. 그리고 두 번째에 좀 더 차분하게 보신 것 같다. 텍스트의 완성도가 있는 것이 좋았다고 하셨고, 원작을 완전히 해체했다 다시 구성해냈다고 말씀하시더라. 구체적으로 장면 두 개를 언급하셨다. '여고생이 왜 남자와 자는 지 알아요?'란 대사에 대해 말씀하셨다. 한국 영화에서 섹스라는 것은 발기됨으로 변하는데, 자기는 그것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고, 그것은 슬픔과 관련돼 있는 것이라 생각하셨다고 한다. 그 섹스가 유한한 슬픔을 다뤘기에 원작을 완전히 이해하고 씌여진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씀 하셨다. 두 번째는 서지우의 교통사고 장면이다. 원작에서 차마 언급하지 못했던 부분인데, 서지우의 표정이 인상적이고 좋았다고 말씀하셨다. 원작자 입장에서 어찌 영화가 만족스럽겠나. 그러나 정말 이러 저러 여러가지 완성을 해낸 것이 대견하다고 하시더라. 두 번째 보니 훨씬 관객으로 재미있게 봤다고도 말씀하시고. 첫 번째는 쿵쿵하는 심장뛰는 느낌으로 보셨다면, 두 번째는 한층 편해진 얼굴로 보신 것 같다.
- 이적요가 눈물을 흘리는 마지막 장면에서 가슴이 아렸다는 사람들이 많다.
▲ 나 역시 그 장면을 찍고 구석에 가서 많이 울었다. 가슴이 아프더라. (이적요와 같은 늙어가는 것에 대한 슬픔을 경험하신 적이 있는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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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철 기자 baik@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