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총선에서 비례대표 국회의원에 뽑힌 필리핀 출신 결혼 이주여성 이자스민 씨에 대한 인종차별성 인신공격이 쏟아지고 있다. 입에 담기조차 민망한 비난의 융단폭격 앞에 잠시 몸을 피했던 그녀가 씩씩하게 대응한 건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의 일과성 해프닝만은 아니며 평균적 한국인에게 깊이 뿌리내린 집단무의식의 일단을 보여준다.
'이자스민 사건'의 배경에는 반만년 역사에 빛나는 단일민족(單一民族)에 대한 한국인의 자부심이 자리한다. 단군까지 이어진 같은 핏줄의 한민족이라는 문화적 상징은 인종적 순혈주의(純血主義)와 분리 불가능하다. 예컨대 2010년까지 사용된 국정(國定)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는 "우리 민족은 반만년 이상의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고, 세계사에서 보기 드문 단일민족국가로서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고 기술했다. 이런 생각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상황에서 '우리보다 열등한 나라 출신이자 짙은 피부 색깔을 가진' 이자스민의 코리안 드림을 탐탁지 않게 보는 한국인들이 의외로 많은 게 현실이다.
이를 입증하는 최근의 통계가 있다. 국민의 정체성과 관련, '한국인은 특히 한국인 조상(혈통)을 가지는 것을 중요시한다'는 여성가족부 조사 결과다. 지난해 말 전국 19~74세의 2500명 시민을 대상으로 국제 비교지표를 활용, 우리나라에서 처음 실시돼 18일에 발표된 '국민의 다문화 수용성 조사'가 바로 그것이다. 이 조사에서 혈통(血統)을 중시하는 답변이 스웨덴 30%, 미국 55%, 일본이 72%인데 한국은 87%에 가까웠다. 순혈주의 정서가 지배적인 한국의 맥락에서 다양한 인종과 문화의 공존에 대해 우리가 부정적인 것도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다문화 공존에 대한 유럽 18개국 국민의 찬성 비율이 74%인데 비해 한국인은 36%에 그친다.
다문화 수용성에 대한 이번 조사 결과는 한국 사회의 모순을 그대로 보여준다. 같은 혈통과 역사를 공유했다는 오래된 단일민족의 신화가 다인종·다문화사회로 빠르게 진입하고 있는 객관적 현실과 날카롭게 부딪히고 있는 것이다. 이런 분열 상황이 제대로 극복되지 않을 때 인종문제로 인한 갈등이 더 악화되겠지만 통합의 전망은 그리 밝지 않다. 한국인의 마음 깊이 자리한 인종적 순혈주의가 우리나라의 역사적 정체성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단군이 우리 민족의 시조(始祖)'라는 논의는 고려 말에 처음 나왔지만 체계화된 단일민족 의식은 근대의 소산이다. 단일민족 이념은 조선 후기 망국(亡國)의 위기와 일제 식민지배 밑에서 한반도의 주민들을 운명공동체로 만드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 결과 인종적 순혈주의와 저항적 민족주의는 서로 뗄 수 없이 얽히게 됐다. 문제는 순결한 핏줄에 집착하는 인종주의가 민족주의의 이름으로 정당화될 때 합리적 개인과 자유로운 시민이 설 자리가 줄어든다는 데 있다. 혈통을 강조하는 폐쇄적 민족주의자들은 '피가 다른' 이자스민씨가 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오랫동안 당당한 한국 시민으로 살아왔다는 사실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
인종주의는 피부색과 문화가 다른 사람들을 차별하는 데다 특정한 인종이 열등하게 태어난다고 믿는다. 역사는 공세적인 인종주의가 온갖 학살과 참극을 불러왔음을 증언한다. 수천만 명의 아프리카 흑인을 노예로 끌고 간 백인의 만행이 대표적 사례다. 나치 독일의 파시즘은 "세계문명은 백인의 창조물이며 열등 인종과의 혼혈은 문명을 타락하게 한다"는 인종이론으로 특정 인종을 절멸시키는 홀로코스트를 자행한 바 있다. 북한의 극단적 민족주의가 그들 나름의 인종주의와 결합한 것도 우연이 아니다. 국가 차원에서 국제결혼을 불허하고 다른 문화를 적대시하는 북한 사회가 극도로 낙후되고 억압적인 것도 당연한 결과다.
작년 7월 폭탄 테러와 연쇄총격으로 무고한 시민 77명을 살해한 테러범 브레이빅(Breivik)은 자신을 이슬람과 다문화주의가 망친 노르웨이를 살린 의사(義士)로 자처하면서 "단일문화를 가진 한국이야말로 완전한 사회"라고 칭송(?)했다. 그러나 대한민국이 문명교류와 경제협력의 한가운데서 세계로 약진하는 오늘날 폐쇄적 단일민족의 신화는 건강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이자스민 당선자에 대한 인종차별적 공격은 시민적 합리성의 이름으로 강력히 규탄되어야 마땅하다. 인종적 순혈주의는 파시즘을 부르며 닫힌 사회를 만드는 암종(癌腫)이다. 세계시민적 상식과 민주적 이성이야말로 현대 한국인에게 핏줄보다 훨씬 중요한 근본가치가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