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비버(The Beaver)'에는 멜 깁슨과 조디 포스터 다음으로 꼽을만한 '특별한 배우' 가 하나 있습니다. 남주인공 월터 블랙(멜 깁슨)이 분신(分身) 처럼 곁에 두는 비버 인형입니다. 나이든 중년 남자가 웬 인형일까요. 상처난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치유력을 가진 존재가 되기 때문입니다.
월터 블랙은 남 보기엔 성공한 것 같지만 실은 불행한 남자입니다. 심한 우울증을 앓고 있습니다. 여러 치료도 해 보고 운동으로 다스려 보려고도 했지만 소용이 없습니다. 늘 잠만 자며 매사에 무기력합니다. 아버지로부터 장난감 회사를 물려받았지만 제대로 경영도 못하는 무능한 사장일 뿐입니다.
가장이 이렇게 흔들리니 집안은 집안대로 엉망입니다. 막내는 학교에서 집단 따돌림을 당합니다. 맏아들은 자기방에 '아버지에게서 안 닮아야 할 것들'을 생각날 때마다 포스트잇에 적어 50여개째 붙이고 있습니다. '절대 아빠처럼 살지 않겠다'는 반항의 몸부림입니다. 롤러코스터 코스를 설계하는 특별한 전문직에서 일하는 아내 매러디스(조디 포스터)는 남편에게 별거를 제의합니다.
따로 나가 혼자 살던 월터가 자살까지 시도할 정도로 삶의 벼랑 끝으로 내몰렸을 때, 우연히 비버 인형을 손에 넣게 됩니다. 마치 삶이 힘겨운 남자를 구하려고 인형이 찾아온 것처럼 보입니다.
월터는 이 낡은 인형 속에 왼팔을 집어넣고 꼭두각시처럼 인형 입을 움직여 가며 그 동안 못한 말들을 남에게,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합니다. 무엇이든 두 앞니로 쉬지않고 갉아대는 강물 속 비버처럼, 월터는 비버 인형을 움직여 가며 줄기차게 말을 합니다. 마치 자신의 말이 아니라 비버가 말하는 듯합니다. 놀랍게도 월터는 비버 인형을 만난 후 마음의 상태가 호전되어 갑니다.
물건들과 사람이 나누는 교감과 그 효과에 관심 많은 나는 영화 내내 남주인공 월터를 따라다니며 변화를 부르는 장난감 비버 인형에 주목했습니다. 장난감이 그렇게 중요한 역할을 할수 있는 것은 사람이 태어나 정신세계를 형성해 가는 과정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하는 물건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태어나 7세까지 가장 많이 접하는 물건이 장난감이라고 합니다. 세상과 소통하는 법에 관해 정신적 걸음마를 하는 시절부터 어린이들은 엄마 아빠 못지 않게 장난감과 말하고, 장난감을 만지며 생활합니다. 어린이들이 여러 인형과 장난감을 늘어놓고 자기 입으로 인형 대신 말하며 놀던 그 모습 그대로, 월터 역시 팔에 끼운 비버 인형을 빌어 하고 싶은 말들을 꺼내놓는 것입니다.
속마음을 그냥 뱉어내는 것보다 무생물인 인형을 내세우는 게 왜 더 쉬울까요. 우리 일상의 장면을 떠올려 봐도 알 수 있습니다. 공원에 젖먹이 아기를 데리고 나온 주부는 어떤 이웃 할아버지가 장난감 선물이라도 하나 건넸을 때 직접 인사하기 쑥스러우면 "아가야 할아버지 감사합니다 해야지…"라며 젖먹이 캐릭터를 빌어서 의사를 표현합니다. 마찬가지로 월터의 비버 인형은 마음이 갇힌 이 사내가 세상과 소통하는 것을 도와주는 도구가 됩니다.
비버 인형은 소통의 보조자를 넘어서 이 외로운 중년 사내의 친구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네 곁엔 내가 있어”월터가 조종하는 비버 인형은 그렇게 말합니다.
월터는 억눌려 있던 내면의 목소리들을 비버를 빌어 내지르면서 카타르시스를 얻는 듯합니다. 비버 인형으로 그 남자는 거듭 납니다. 행복한 척하며 살아왔지만 실은 불행했던 이 남자는 점잖은 체 하는 것을 중단하고 자신의 본능적 자아를 드러냅니다. 갇혀 있던 그의 열정들이 되살아납니다. 장난감 회사 경영자인 그의 머릿속에 온갖 아이디어가 샘솟습니다. 둘째 아들이 망치와 나무를 들고 노는 것을 보고는 당장 ‘비버 목공놀이 세트’를 개발해 대 히트를 시킵니다. TV에도 출연해 유명해집니다.
물론 이 영화가 “모든 게 잘 풀리고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하는 해피 엔딩으로 가지는 않습니다. 비비와 월터의 관계도 시간이 흐르면서 사이 좋은 친구를 넘어서 뜻밖의 상황이 빚어지기도 합니다. 월터의 두 자아는 분열하고 충돌하기도 합니다.
‘비버’는 부자 관계를 중심으로 가족이란 무엇인가를 파고드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다른 학생의 과제물을 대신 써주고 돈을 받는 변칙적 사업을 하던 고등학생인 큰 아들이 자신을 찾는 치유의 여행을 떠나려는 이야기도 음미할 만합니다.
영화배우 조디 포스터가 감독을 맡은 이 영화는 인물들 내면에 일어나는 여러 정신적 변화들을 섬세하게 보여줍니다. 현대인들의 마음이 무엇 때문에 무겁고 무엇 때문에 행복하지 않은지에 관해 깊이있게 짚어줍니다. 심심함을 달래줄 오락영화를 찾는 사람에게는 권하고 싶지 않습니다. 마음을 다쳐본 경험이 있거나 지금 마음이 아픈 사람들에는 가까이 다가갈 영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