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관 하나가 전 세계를 뒤집는다." 1934년 4월 19일 열린 '제1회 과학데이 기념식' 공식 포스터엔 이런 문장이 적혀 있었다. 78년이 지난 오늘날, 국내 과학계엔 '세상을 뒤집을 만한 시험관'이 몇 개나 완성됐을까? 맛있는공부는 제45회 과학의날(21일)을 앞둔 지난 9일, '과학 한국'의 현재와 미래를 대표하는 이들의 만남을 주선했다. 주인공은 백성희(42)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박스 참조〉와 이태경(경기과학고 3년)군. 백 교수의 연구실에서 마주한 두 사람은 금세 둘도 없는 '멘토'와 '멘티'가 됐다.

◇‘기초과학=의대 진학 교두보’ 취급하면 곤란

‘멘토’ 백성희 교수가 이날 만난 ‘멘티’ 이태경군에게 최근 자신이 진행 중인 실험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백 교수는 “1년 내내 실험을 거듭해도 성공할 때보다 실패할 때가 훨씬 많다”며 “과학자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은 일희일비하지 않는 배짱”이라고 말했다.

"교수님은 최근 이공계 기피 현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이태경) "글쎄요. 아닌 게 아니라 최근 '임금이 낮고 고용이 불안정하다'는 이유로 연구직 대신 의과대학원행을 결정하는 학부생이 많습니다. 분명한 건 기초과학 공부가 '의대 진학의 교두보'는 아니란 사실이죠."(백성희)

백 교수는 어린 시절부터 과학자를 꿈꿨다. "어머니(조혜경 전 경인교대 과학교육과 교수)는 제가 아주 어릴 때부터 '과학=쉽고 재밌는 것'이란 사실을 몸소 보여주셨어요. 리트머스 용지같은 실험 도구가 제 장난감이었죠. 저 역시 어머니의 교육 방식을 물려받았어요. 언젠가 실험실에 들른 딸에게 쥐 해부를 시켜본 적도 있습니다. 처음엔 징그럽다더니 금세 두 팔 걷어붙이고 쥐 뇌를 관찰하더군요."

그는 "순수 과학자의 길을 걷게 된 걸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사실 인생에서 확정된 건 아무것도 없잖아요. 그래서 전 일찌감치 제가 재밌어하는 쪽으로 진로를 정했죠. 지금은 다시 태어나도 과학자가 되고 싶을 만큼 제 직업에 만족합니다."

◇과학자로 성공하려면 '관심 분야'부터 찾아야

이군은 국내 유수 대학의 연구 프로젝트에 참여하며 생긴 고민을 백 교수에게 털어놓았다. "오랫동안 수많은 과학자가 다양한 연구를 해놓은 덕분(?)에 정작 제가 연구할 주제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기술적 측면에서 보면 컴퓨터와 접목된 분야가 유리할 것 같아요. 그 이외엔 점쟁이가 아니면 모를 걸요.(웃음) 생명과학 분야만 해도 제가 몸담았던 20년간 수많은 연구가 뜨고 졌으니까요. 마지막엔 스스로 흥미로운 연구를 묵묵히 계속한 사람이 성공해요. 태경군도 자신이 궁금한 게 뭔지부터 찾아보세요."

이날 백 교수가 이군에게 귀띔한 과학자의 자질은 엉뚱하게도 '함께 밥 먹고 싶은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미래엔 학문 간 교류를 바탕으로 하는 '융합 연구'의 비중이 커질 테고, 다른 분야 전문가에게서 필요한 도움을 받으려면 적절한 협업이 필수란 얘기다. "협업으로 좋은 결과물을 내려면 반드시 서로에 대한 호감과 신뢰가 있어야 합니다. '과학자는 외골수'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데 과학자도 사람 만나는 걸 즐겨야 더 좋은 결과를 내놓을 수 있어요."

◇과학? 작은 발견으로 세상 바꿀 수 있는 학문

백 교수는 "황우석 전 서울대 수의학과 교수 덕분에 한국 과학계의 위상을 실감했다"고 말했다. "황 전 교수가 논문을 발표했을 때 외국 학자들이 제게까지 축하 메일을 보내왔어요. 그 중 일부는 지금도 그의 안부를 묻곤 하죠. 그만큼 세계 과학계가 우리나라를 주목하고 있다는 얘기예요. 제가 단장으로 있는 크로마틴 다이나믹스 창의연구단에서 학회를 열기 위해 외국 학자를 초청할 때도 대부분은 한달음에 달려옵니다. 한국 과학계에 대한 신뢰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죠."

끝으로 그는 이군에게 '과학자가 가져야 할 마음가짐'에 대해 조언했다. "재작년 시아버지가 암으로 돌아가셨어요. 마음 아픈 한편으로 제 연구의 필요성을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아픈 사람 한 명 치료하는 일도 물론 중요하죠. 하지만 기초과학은 오랜 시간의 노력 끝에 얻은 '작은 발견' 하나로도 세상을 바꿀 수 있어요. 태경군을 포함, 과학도를 꿈꾸는 학생 모두가 이런 자부심을 품고 살았으면 합니다."

백성희 교수는 누구?

▷암(癌) 전이 연구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 1990년 서울대 자연과학대 분자생물학과에 입학했고 1999년 같은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5년 세계 최초로 암 전이 억제 유전자와 해당 유전자의 조절 메커니즘을 밝혀냈고 지난해엔 암세포 죽이는 단백질의 존재를 규명했다. 제10회 한국 로레알 유네스코 여성생명과학상 진흥상(2011)과 교육과학기술부 선정 젊은과학자상(생명과학분야·2009)을 각각 수상했다. 올해 서울대 입학식에서 여교수 최초로 축사를 낭독했다.

만남 후기

백성희ㅣ"태경군을 보며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흰 도화지 같다'고 생각했어요. 특히 제 연구논문을 꼼꼼히 읽고 준비해 온 ROR??(알파), 베타카로틴 관련 질문은 무척 인상적이었답니다. 과학을 사랑하는 그 마음, 앞으로도 변치 않길 바라요."

이태경ㅣ"서울대 생명과학부 진학을 꿈꾸는 제게 교수님과의 만남은 무척 큰 도움이 됐습니다. 내일 있을 시험 준비 시간을 아껴가며 교수님을 뵌 보람이 있네요. 앞으로도 오늘 만남을 떠올리며 연구자의 꿈을 키워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