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누군가의 말에 깊게 베어 상처받았다면, 상처 때문에 숨쉬기가 힘들어 걸을 수 없다면, 당신은 경주로 가야 한다. 만약 그것이 상실과 죽음과 같은 종류의 돌이킬 수 없는 내상이라면, 경주는 그 상처를 말없이 품고 보듬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신라 천 년의 도시 경주는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를 위로한다. 한 번은 열일곱 꽃다운 나이에 떠났던 수학여행의 아련한 추억으로, 한 번은 어미의 넓은 가슴팍 같은 죽은 왕들의 젖무덤 같은 무덤으로, 다른 한번은 한입 물면 넘치지 않는 달달함이 감도는 황남빵으로. 나는 한때 무턱대고 경주에서 태어나거나 자란 아이들을 부러워하기도 했다. 경주의 삼릉에서 새벽 소나무를 보다가, 그곳으로 이사 갈 생각에 동네 근처의 부동산을 돌아다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경주빵' '황남빵' 같은 빵집 간판이 유달리 많아 마음이 갓 구운 빵처럼 부풀어 올랐던 기억 역시.

경주 시가지의 가장자리에 위치해 있는 대릉원 지구. 천 년도 넘은 무덤 앞을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자전거를 타고 지나친다. 하나의 풍경이 되어버린 신라의 왕과 귀족들의 무덤 앞에서도 삶은 무심하게 흘러간다.

대학시절 강석경의 '인도기행'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인도기행'을 읽은 건 그전에 헌책방 거리에서 산 에세이 '일하는 예술가들'이란 책이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나로 말하면 그녀의 소설보다 그녀가 쓴 에세이를 훨씬 더 많이 읽은 셈이다. 소설가가 쓴 에세이가 그 작가의 소설보다 더 좋다는 말이 작가들에겐 험담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별스럽게도 나는 소설보다 그 작가의 에세이를 더 좋아하는 경우가 꽤 많았다.

가령 '달이 두 개 뜨는 세상'에 대해 쓴 하루키 소설보다, 두부나 갓 튀긴 고로케를 사러 시장을 돌아다니는 하루키 에세이를 조금 더 좋아했고, 박찬욱 영화보다 박찬욱이 짧지만 강렬하게 일했던 칼럼니스트 시절의 글들, 특히 B급 영화에 대해 말할 때 그의 글에서 느껴지는 박식한 흥분을 좋아했다. 좋아하는 작가를 조금 더 알고 싶은 관음증이 작용한 탓도 있었을 것이다.

강석경의 에세이 '능으로 가는 길'은 경주의 신라 왕릉이 조성된 내력과 왕릉 주인인 역대 왕들의 치세와 시대상, 그리고 왕릉과 경주를 돌며 사유했던 작가의 단상을 아름답게 저술한 책이다. 책의 목차는 '문명에 대하여' '슬픔에 대하여' '고독에 대하여' '위로에 대하여'처럼 인간의 삶에 대한 내용들을 담고 있는데, 그것을 경주 곳곳에 흩어져 있는 '능'과 연결하여 쓴 작가의 사색이 이 책의 독특한 맥박을 만들었다. 주위를 둘러보며 느리게 산책하다가 돌연 걸음을 멈추고 깊이 사유하는 사람 특유의 리듬 말이다.

특히 '슬픔에 대하여'는 잘 알려져 있는 신라의 진덕여왕과 선덕여왕의 '능'을 사유하고 있다. 그녀는 경주의 11월을 '첼로의 저음' 같은 11월이라고 표현하는데, 신라의 능을 걸으며 상처받은 몸을 이끌고 경주에 돌아온 자신을 스스로 '회귀했다'라고 표현한다. 그 능을 걸으며 그녀는 류시화의 '슬픔에게 안부를 묻다' 같은 시를 생각하고, 삶의 슬픔에 대하여 노래한다.

'너였구나/나무 뒤에 숨어 있던 것이/인기척에 부스럭거려서 여우처럼 나를 놀라게 하는 것이/슬픔, 너였구나/나는 이 길을 조용히 지나가려 했었다/날이 저물기 전에/서둘러 이 겨울숲을 떠나려고 했었다/그런데 그만 너를 깨우고 말았구나/내가 탄 말도 놀라서 사방을 두리번거린다/숲 사이 작은 강물로 울음을 죽이고/잎들은 낮은 곳으로 모인다/여기 많은 것들이 변했지만 또/하나도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한때 이곳에 울려퍼지던 메아리의 주인들은/지금 어디에 있는가/나무들 사이를 오가는 흰새의 날개들 같던/그 눈부심은/박수치며 날아오르던 그 세월들은/너였구나/이 길 처음부터 나를 따라오던 것이/서리 묻은 나뭇가지를 흔들어 까마귀처럼 놀라게 하는 것이/너였구나/나는 그냥 지나가려 했었다/서둘러 말을 타고 이 겨울숲과 작별하려 했었다/그런데 그만 너에게 들키고 말았구나/슬픔, 너였구나/'

경주에 와서 가장 놀란 건, 무덤이 있는 공원이 너무나 많다는 것과 그 무덤 앞에서 아이와 함께 배드민턴을 치거나 연인과 함께 김밥을 먹는 보통의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었다. 너무나 인상적이어서 그림을 그릴 줄 안다면, 그때의 모습을 연필로 빼곡히 스케치하고 싶었다. 특히 밤의 대능원의 모습은 어느 도시에서도 볼 수 없는 아우라가 있다. 어둠 속에 잠겨 있는 거대한 신라왕들의 무덤은 신비롭다 못해 처연함마저 주는데, 그곳을 걷다 보면 죽은 자가 산 자를 향해 어떤 말을 속삭이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러므로 대능원은 반드시 '밤'에 가봐야 한다.

내게 경주의 기적은 천 년이 넘은 무덤가 옆에서 아이가 뛰어들고, 청춘들이 사랑을 속삭이고, 젊은 부부가 배드민턴을 치는 모습이었다. 죽음 앞에서도 기어이 삶이 움직이고, 무덤가 위에서도 뿌리 깊은 나무와 아름다운 꽃이 자라는 모습 때문에 나는 늘 이 먼 도시까지 와서 마음속 상처 하나를 슬며시 내려놓고 가는 건 아니었을까.

●능으로 가는 길: 천년고도 경주의 왕릉을 배경으로 소설가 강석경과 사진작가 강운구가 신라 왕들의 무덤에서 찾아낸 슬픔, 위로, 꿈, 아름다움 등에 대한 이야기. 산문과 그림 같은 사진이 어우러진 산문집으로 신라왕들의 탄생설화와 일대기, 당대인들의 애환 어린 삶이 그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