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 50억 몽땅 날리고 부산에 내려갔을 때 사람들은 제가 산으로 갔네, 어쩌네 말이 많았어요. 그때마다 속으로 ‘웃기고 있네. 난 다시 일어날 수 있어!’ 하고 배짱을 부렸죠.”
태권도 세계챔피언 출신 연기자 이동준에게는 그의 말마따나 밀어붙이는 배짱이 있다. 그 배짱이 지금까지도 이 배우를 연기하게 만드는 힘이다.
인터뷰 이틀 전, 이동준에게서 전화가 왔다. "경치 좋은 데가 있다"며 기자에게 남양주의 한 카페 주소를 문자로 보내왔다. 이동준이 운영하는 '네 번째' 라이브카페다. 그의 곡절 많은 인생은 이 네 번의 라이브카페와 궤적을 같이한다. 첫 번째 라이브카페에서 번 돈을 몽땅 영화에 투자했고, 그 영화가 망해 진 빚을 두 번째 라이브카페에서 갚아나갔다. 세 번째 라이브카페는 드라마 에 복귀하기 전까지 운영했고, 현재 네 번째 라이브카페를 운영하며 연기와 인생을 즐기고 있다.
"노래 부르고 노는 걸 좋아해요. 딴 데 가서 그러느니 내 가게에서 팬들하고 같이 즐기는 게 좋겠다 싶어서 라이브카페를 차렸죠."
원래는 '한우랑'으로 시작한 한우 전문점이 약 1년 전부터 라이브카페 '한사랑'으로 바뀌었다. 한 시간 일찍 도착한 기자가 문을 열고 들어서니 덩치 좋은 꽃중년 이동준이 청소기로 바닥을 밀고 있다. 아이러니한 풍경이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시작한 태권도
세계챔피언이 되다
충북 청원군 강외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이동준은 꽤 유명한 학생이었다. 180㎝는 족히 넘어 보이는 키와 덩치를 보면 학창시절의 인기가 대충 짐작이 간다. 그런 그가 반에서 '운동 좀 하는 아이'로 손꼽힌 건 어찌 보면 당연하다. 본격적으로 태권도에 매진한 건 중학교에 올라가면서부터다.
"초등학교 다닐 땐 태권도뿐 아니라 배드민턴, 육상, 배구까지 네 가지를 했어요. (선생님이) 운동하는 애들에겐 이 시합도 나가라, 저 시합도 나가라, 하면서 이것저것 다 시켰거든요."
태권도를 배운 건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어느 날 동네에 도장이 생겼고, 친구들을 따라 월 회비 400원에 등록했다.
"얼마 있다 파란 띠를 땄는데 (기분이) 날아갈 것 같더라고요. 전교에서 덩치가 제일 큰 녀석이 우리 반에 있었는데, 그 친구에게 정식으로 도전장을 냈죠. 나랑 한 판 붙자고요. 그때까지 걔 힘을 따라갈 사람이 없었거든요."
파란 띠를 따고 나니 무서울 게 없었던 걸까. 하지만 학교 '짱'과의 싸움에서 그는 발 한 번 못 써보고 항복해야 했다.
"발차기 한 번만 하면 넘어뜨릴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게 잘 안 되는 거라. 순식간에 그 친구에게 목을 졸렸어요. 집에 왔는데 당최 분이 안 풀리더라고요. 혼자는 도저히 안 되겠고, 결국 동네 친구 다섯 명을 데리고 그 친구를 찾아갔어요."
요즘 같은 때 잘못 말하면 '학교폭력'이고, 좋게 말하면 치기 어린 학창시절 동네 '쌈짱' 자리에 오르고 싶었던 거다. 그날 5대1 싸움의 희생자가 된 친구를 훗날 모 방송프로를 통해 찾기도 했다.
"지금은 제 덩치가 더 크더라고요. 그 친구는 그때가 다 자란 키였나 봐요. 연락요? 가끔씩 하지요."
국가대표 선수 은퇴와 동시에
배우로 데뷔 선언
태권도 세계챔피언을 세 차례나 거머쥐었다. 선수생활 8년 차에 접어들 무렵, 모 월간지 기자가 그를 취재하기 위해 태릉선수촌을 찾았다. 은퇴를 앞둔 그에게 기자가 물었다. "이동준 선수는 비주얼도 준수한데, 연예계 쪽엔 관심 없나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그가 답했다. "기회가 되면 하는 거죠, 뭐." 그게 발단이었다. 은퇴 선언 후 충무로에서 득달같이 연락이 왔다. 첫 작품부터 주연이라니, 풀려도 너무 잘 풀리는 시작 아닌가.
"제가 86년도 2월에 은퇴했으니까, 한 반 년쯤 뒤에 제의를 받았죠. 그래서 (감독을) 만났는데 대본 하나를 건네더라고요. 보니까 내가 남자 주인공인 거라. 게다가 액션일 줄 알았는데 멜로였어요. 일단 시간을 좀 달라고 했죠."
그 작품이 이동준의 데뷔작 이다.
"고등학교 때 친구 한 명이 영화배우 하겠다고 충무로에 갔다가 돈만 뜯기고 엑스트라로 겨우 한 컷 찍고 온 적이 있어요. 근데 나는 처음부터 주인공이라니, 안 받아들일 이유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오케이 했어요."
그렇게 배우생활을 시작했다. 물론 연기에 대해 아는 건 하나도 없었다. 오로지 운동으로 다져진 '깡다구'와 '배짱'이 있을 뿐이었다.
"연기의 '연' 자도 모르는 놈이 하게 된 거 아닙니까. 감독이 조언을 해주긴 하지만, 그래도 기본 바탕이란 게 있어야 하는데 그게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생각한 게, '다른 배우들이 대학에서 이론공부 4년 한 걸 나는 현장에서 실전으로 공부하자'였어요. 그래서 대본이 들어오면 어떤 작품도 마다하지 않고 다 했어요."
그는 중간에 "내가 이 길로 왔으면 끝까지 가야 하는데"라는 말을 했다. 운동을 하면서 그는 진 적이 별로 없었다. 지더라도 곧 다시 정상을 탈환했다. 운동선수에게는 기본적으로 승부 근성이 있다. 그도 마찬가지다. 배우라는 문턱을 넘어서면서, 연기는 그에게 취미가 아닌 승부수를 띄워야 할 대상이었다.
"운동을 하면 부상을 자주 당하잖아요. 저는 허리를 다쳤어요. 태권도는 단체 운동이 아닌 개인 운동이라, 곧 자신과의 싸움이거든요. 아침에 진통제 맞고 나가서 운동하고, 오후에 약발 떨어지면 또 진통제 맞고 나가서 운동하기를 반복했어요. 젊은 시절 그런 자기와의 싸움이 제게는 돈 주고 살 수 없는 값진 경험이었어요. 연기하다 힘들면 그때 생각을 했어요. '내가 그 힘든 운동으로 세계챔피언을 몇 번씩이나 했는데, 이까짓 거 이겨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
연기가 쉬웠다는 게 아니다. 운동할 때만큼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는 뜻이다. 운동보다 더 힘든 건 없다고 생각하면서.
"좋은 감독 만나 생애 단 한 번 받을 수 있다는 대종상 신인상을 받았어요. 연기자로 인정을 받았고, '이동준'이라는 이름도 알릴 수 있었죠. 이후 방송사에서 스카우트해 드라마를 하게 됐어요. 그러다 보니 충무로(영화계)에서 나라는 사람은 자연스레 잊히더라고요."
드라마에 출연하기 시작하면서 안방에서 그를 보는 일이 잦아졌다. 2004년에 영화 으로 쓴맛을 보기 전까지는 그랬다.
영화로 날린 50억
“실패 아닌 실수”
영화 은 이동준의 한이 맺힌 졸작이다. 50억 원이 넘는 돈을 투자했지만 본전은커녕 반도 못 건졌다. 주특기인 태권도를 사용한 액션, 진부하지만 아직은 먹히는 부녀간의 감동 코드, 거기에 할리우드 액션스타 시티븐 시걸까지. 그런데 의욕만 너무 앞섰던 걸까. 배급사의 만류를 뿌리치고 개봉일을 앞당기는 바람에 할리우드 대작 와 맞붙는 불상사가 벌어졌고, 급기야 극장에 걸린 지 3일 만에 막을 내렸다. 이후 부산으로 내려가 빚을 갚으면서 영화에 대한 미련도 함께 떨쳐냈다.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그는 “그게 맞는 일”이라고 말한다.
“영화를 만든 이유는 태권도 때문이에요. 외국에서는 이제 막 태권도가 각광받고 인정받기 시작했는데, 정작 종주국인 우리나라에선 별 관심이 없었죠. 태권도의 위상을 세계에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홍보할 사람이 없었어요. 단순한 생각으로 ‘아, 그럼 내가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어요. 영화는 그 홍보 수단이었고요.”
스티븐 시걸까지 섭외해가며 태권도 영화 제작에 돌입했다. 그런데 영화라는 게 제작비만 있다고 일사천리로 돌아가는 일이 아니지 않는가. 유명한 감독도, 안목 있는 제작자도 관객의 마음을 미리 읽을 수 없는 게 영화판이다. 열정에 비해 그 결과는 너무도 참담했다.
“영화 만들기 전에 미사리에서 라이브카페를 했어요. 그땐 정말 돈을 갈퀴로 긁어모으다시피 했죠. 그러다 영화에 20억을 투자하겠다는 회사를 만났고, 그때부터 사무실 내고 좌판을 깔았어요. 근데 제 돈은 이미 들어간 상태에서 투자하겠다던 회사가 돈을 안 보내줬어요. 결국 집 팔고 가게 팔면서 전부 제 돈으로 올인했죠.”
그가 직접 배우로 분한 은 정통 태권도 활극이다. 2003년 12월 크랭크업 후, 배급사인 시네마서비스는 다음 해 9월로 개봉 시기를 잡았다. 이동준은 9월은 너무 늦다고 했다.
“촬영은 12월에 다 끝났는데 개봉을 9개월 후에 하자는 거예요. 왜 그렇게 한참 뒤에 하느냐며 (앞당기자고) 밀어붙였죠. 제가 너무 똥배짱이었어요. 밀어붙이는 걸로는 1등이거든.(웃음) 운동을 하다 보니 판단이 빨라요. 판단을 빨리 해야 상대를 제압하니까. 이리 재고 저리 재는 건 잘 못해요. 어리석었죠. 결과적으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랑 맞붙는 꼴이 됐으니까요.”
대작 와 함께 개봉한 은 극장에 걸린 지 3일 만에 자취를 감췄다. 보고 싶어도 볼 곳이 없었다. “(영화관에 오래 걸리지 못한 게) 얼마나 한이 됐는지, 부산 시민회관과 KBS홀을 대관해 영화를 상영했어요. 돈보다도 ‘내 영화를 봐달라’는 마음이었죠. 일주일 동안 6만 명 관객이 다녀갔어요. KBS홀 3500석이 꽉 찼죠. 그때 생각했어요. ‘아, 이걸로 내 한은 다 풀었다.’”
그때 번 돈을 밑천 삼아 부산 광안리에서 라이브카페를 시작했다. “부산에 가면 터널이 많아요. 그 터널 근방의 광고판을 전부 다 샀어요. 그리고 ‘이동준의 프로포즈’라 쓰인 홍보 벽지로 도배를 했어요. 터널을 오가는 부산 시민들이 그걸 보고 제 가게로 몰려들었죠. 덕분에 금방 일어설 수 있었어요.”
홍보, 마케팅을 잘했다고 하자, “그걸(영화 흥행 실패를) 계기로 공부한 거죠”하며 웃는다. 실패를 더 큰 기회로 삼았다고 하자, “실패라고 생각 안 한다. 순간 실수를 한 것이다”라는 답변이 돌아온다. 배짱 뒤에 숨겨진 그의 자신감을 보았다. 이동준은 긍정적이고 진취적이다. 그 정도 시련쯤이야 툴툴 털고 일어날 수 있는 사람이다.
손문권 PD·임성한 작가 부부의
결혼식 주례를 본 사연
빚을 전부 청산하고 부산을 떠나올 무렵, 보이지 않는 배우만 섭외하기로 유명한 스타 작가 임성한이 이동준을 찾았다. 덕분에 이후 브라운관에서 볼 수 없었던 그를 2007년, 임 작가의 에서 오랜만에 볼 수 있었다.
“그 사람(임성한 작가)은 훌륭한 게 뭐냐면, 일 많이 안 하는 사람이나 신인들을 주로 찾아요. 저만 해도 영화가 망하고 한동안 서울을 떠나 있었거든요. 그런데 (임 작가가) ‘그 사람 어딨나’ 하고 찾아본 거예요. 그래서 에 합류하게 됐죠.”
얼마 뒤, 그는 의 손문권 PD로부터 임 작가의 결혼식에 주례로 서줄 수 있겠느냐는 제안을 받는다. 흔쾌히 오케이 하고 식장에 도착해서야 그날의 신랑이 손문권 PD라는 사실을 알았다. 임성한 작가의 드라마만큼이나 드라마틱한 상황이었다.
"어느 날 손 감독에게서 전화가 왔어요. 부탁이 하나 있대요. 작가 선생이 비밀리에 결혼을 하는데 주례를 해줄 수 있겠느냐고요."
작가와 배우로서의 인연 외에 별다른 친분은 없었지만 얼떨결에 주례를 보았다. 모습을 보이는 일이 거의 없기로 유명한 임성한 작가와는 딱 세 번 만났다. 결혼식 때 한 번, 쫑파티 때 한 번, 사석에서 한 번. 다음 작품 에 출연한 건 손 PD와의 인연 때문이다.
“다음 작품에 캐스팅하고 싶다고 전화가 왔어요. ‘무슨 역할인데?’ 물었더니 ‘형님 성격대로 편하게 하시면 돼요’ 하더라고요. 그래서 한 게 의 금강산(허영덩어리 아내를 둔 성형외과 원장) 역이에요. 외적으로는 포스가 느껴지는 강한 남잔데 실상은 전혀 아닌 캐릭터. (진지한 표정으로) 제가 원래 좀 착한 성격이에요.”
오랜만의 촬영 현장이 어색하진 않았느냐고 물었다. 과장을 조금 보태 분초 단위로 돌아가는 연예계에서, 잠깐이라도 얼굴을 안 비친 배우는 금세 잊히기 마련이다.
"(과거 연기 경력이 있으니까) 감독이 믿고 맡겼어요. 에서 자주 부딪힌 김병기 선배와는 예전에 드라마 에서 함께 한 적이 있어요. 당시에도 친했는데, 공교롭게도 작품을 또 같이하게 되면서 재미있게 촬영했죠."
그는 변화에 큰 불편이나 어색함을 느끼지 않는 듯했다. 원래 적응을 잘하는 성격이거나, 예민하게 주변을 의식하는 스타일이 아닌 것이다.
결혼 4년 만에 낳은 아들
연기하는 부자(父子)
이동준은 아들을 ‘아우’라 부르고, 아들은 아버지를 ‘형님’이라 부른다. 이들 부자에게 ‘호형호제’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결혼 4년 만에 얻은 귀한 아들은 어느덧 대학 입학을 앞둔 성인이 됐다. 그런데 이 ‘지나치게 어른스런’ 아들은 대학 합격(지난해 한양대 연극영화과에 수시합격)의 기쁨을 누리기도 잠시, 벌써부터 카투사 준비를 위해 토익학원 수강신청을 했단다. 제대 후 연기를 ‘제대로’ 한번 해보겠다는 스무 살 청년의 패기가 그저 빈말처럼 들리지는 않는다. 인터뷰 말미에 동석한 아들 일민 군과 잠깐 대화를 나눴다.
“어릴 때 유학을 보냈어요. (아들이) 자동차를 어찌나 좋아하는지, 자동차 그림을 그릴라 치면 보닛 안에 엔진까지 그릴 정도였죠. 그래서 ‘카 디자인’을 공부하라고 미국에 보냈어요.”
그가 영화 실패로 고생할 때 아내와 아들은 미국에 있었다. 버팀목이 되어줄 가족이 없었던 셈인데,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옆에 있었으면 오히려 부담스러웠을 거예요. 제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다 보게 되잖아요. 매달 미국으로 부치던 돈은 어떻게든 구해서 보냈어요. 그래서 아내는 아마 (내가 힘들다는 걸 어느 정도) 알긴 알아도 피부로 와 닿게 느끼진 못했을 거예요.”
대학교 1학년 때 만난 아내와는 장장 10년 동안 연애했다. 당시 아내는 운동하던 남자친구의 연예계 진출을 결사반대했다.
“(국가대표 은퇴하고) 영화하겠다고 하니까 이해를 못 하더라고요. 연기하면서 상대 배우랑 스킨십하고 그러는 게 이해가 안 간다고요. ‘배우 하면 나랑 결혼 못 한다’고도 했어요. 나중에 대종상 받고 나서는 많이 좋아했죠.”
서른이 다 되어 결혼식을 올렸지만 예상 밖의 난제를 만났다. 아이가 생기지 않았던 것이다. 불안한 마음에 강아지도 길러보고 진지하게 입양을 고민해봐도 답이 안 나왔다. 시험관 아기를 두 차례나 시도했지만 전부 실패였다. 그렇게 4년이 지났을 무렵, 아내가 일민 군을 임신했다.
“어렵게 낳은 아들 아닙니까? (아이가) 성인이 되니까, 아버지가 아닌 맏형처럼 지켜주고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다가가기 어려운 아버지 말고 친구 같은 큰형님이요.”
작년까지 f(x)의 설리, 미쓰에이의 수지가 다니는 서울공연예고 3학년이었던 일민 군은 오는 3월 한양대 연극영화과에 입학한다.
“처음엔 아버지가 연예인이라는 사실을 숨겼어요. 근데 어느 순간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왜 굳이 숨겨야 하지? ‘누구 2세’라는 시선이 부담스러우면 본인 스스로 노력해서 실력을 갖추면 되는 거 아닐까?”
3년 전, 의 막내 궁호박 역으로 데뷔한 일민 군은 이듬해 의 춤 잘 추고 활발한 고등학생 영수를 연기했다. 첫 작품보다 비중은 작았지만 브라운관에 얼굴을 보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신인 배우인 그에게는 자극이 됐다.
“이 끝나고 다음 작품에 주연급으로 캐스팅이 됐어요. 액션스쿨에 다니면서 몸을 만들고 있었는데 도중에 엎어졌죠. 상처를 많이 받았어요. 신인이라서 잠시만 쉬어도 금방 잊히거든요. 아직 부족한 게 많아요. 연기를 좀 더 배운 다음 다시 시작하려고요.”
이런 아들을 바라보는 아버지 이동준의 얼굴에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 그는 이 한마디를 덧붙인다.
"솔직히 말하면, 난 운동할 땐 최고의 자리까지 가봤어요. 하지만 연기자로서 (나에게) 점수를 준다면 최고는 아니에요. 연기한 지 26년이나 됐지만, 아직도 내 얼굴을 보면 이름을 떠올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만큼 최고에 오르지 못했다는 뜻이겠죠. 아들은 나 같지 않았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