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출간 4일 전 자택에서 만났다. 드디어 침묵을 깼다. 꼭 4년 만이다. 참여정부 시절 대통령비서실 정책실장이었던 사람. 그리고 신정아의 남자로 불렸던 사람. 변양균(63)이 ‘노무현의 따뜻한 경제학’(바다출판사)이라는 책을 펴내면서 세상 밖으로 나왔다. 노무현의 경제정책을 정리한 이번 저서에서 그간 하지 않았던 신정아에 대한 이야기도 꺼냈다.
이른바 ‘신정아 사건’으로 엘리트 공무원에서 스캔들의 주인공으로 한순간에 추락했던 변양균 전 청와대 비서실 정책실장. 2009년 대법원으로부터 대부분의 혐의에 대해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외부 활동은 전혀 하지 않았던 그다.
사건 이후 그는 말 그대로 칩거했다. 2011년 5월 12일 서울 인사동 서울미술관에서 열린 노무현 전 대통령 2주기 추모전시회에 참석한 것이 가장 최근 소식이다. 신정아가 ‘4001’이라는 책을 들고 나와 본인의 이야기로 세상을 뒤집어놓았을 때도 그는 조용했다. 덕분에 사람들의 뭇매를 고스란히 맞아야 했다. 사실이든 아니든, 신정아는 변양균과의 만남부터 이별까지를 상세하고 구체적으로 썼고, 사람들 기억에서 사라진 그를 다시 끄집어냈다.
부산고와 고려대 그리고 행정고시 패스. 엘리트 코스를 밟으며 최고 경제통으로 승승장구하던 그는 하루 아침에 평생의 업을 잃었다. 경제기획원, 재정경제원, 기획예산처를 거치며 경제개발, 정부 예산 및 기획 분야에서 공직생활을 이어온 그의 추락은, 당시만 해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지금은 기업(휴맥스, 코리아본뱅크)에서 고문직을 맡아 경제 전문가로서의 생활을 시작했지만, 세상에 나서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상황이 이러하니 자연스럽게 짐작할 수 있는 사실. 그는 지금 가슴에 맺힌 말이, 하고 싶은 말이 얼마나 많을까. 그의 책은 당연히 자서전일 줄 알았다. 하지만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그는 경제정책 이야기를 담은 책을 출간했다. 본인의 입장을 정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노무현 대통령과 참여정부를 향한 개인적인 참회의 마음 때문에 썼다고 한다. 제목은 ‘노무현의 따뜻한 경제학’이다.
# 책 출간 D-4
경제전문가로 활동 스타트
그의 책이 출간된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경기도에 있는 그의 자택을 찾았다. 그의 집은 산자락에 자리 잡은 2층 단독주택. 조용하고 공기 좋은 이곳에서 그는 20년 넘게 살고 있다. ‘신정아 사건’ 이후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던 시절에도 그는 이 집을 떠나지 않았다.
언론에 공개됐던 몇 개월 전과 비교하면 외관이 조금 달라져 있었다. 잔디가 깔려 있던 넓은 정원에는 새 건물이 생겼다. 이웃 주민의 말에 의하면 부부의 서재 및 작업실 용도로 지은 것이라고 한다. 도로 쪽으로 난 창문이 통유리로 되어 있어 내부가 잘 들여다 보였다. 그의 서재는 카페의 작은 룸처럼 꾸며져 있었다. 원목 테이블과 의자를 중심으로 한쪽에 마련된 테이블 바에는 에스프레소 기계가 놓여 있었다. 공간이 넓어서인지 한쪽 구석에는 자전거도 세워져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나흘 뒤 세상에 공개될 그의 책 ‘노무현의 따뜻한 경제학’이 여러 권 쌓여 있었고 바닥에는 책이 담긴 박스가 놓여 있었다. 그가 요즘 지인들에게 자신의 책을 선물하며 인사 나누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출판사 관계자의 말은 사실이었다.
이윽고 넥타이를 하지 않은 흰 와이셔츠 차림의 변양균이 문을 열고 서재에서 나왔다. 맨발에 실내용 슬리퍼를 신고, 한 손에는 서류로 보이는 종이를 든 채 셔츠의 단추를 채우면서 걸어가는 그는 분주해 보였다. 외출 준비를 하고 있는 듯했다. 대문 앞에는 그의 차가 있었다. 운전석에 개인 기사로 보이는 사람이 있었고, 차에는 시동이 걸려 있었다.
얼마 후 깔끔한 코트 차림의 그가 현관문을 열고 대문으로 걸어 내려왔다. 기자를 보고 당황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책 출간 소식 듣고 찾아왔다. 오랜만의 행보가 반갑다. 여전히 건강해 보인다”는 말을 건네자 웃으며 화답했다. 기자가 건넨 명함을 또박또박 읽어 내린 그는, “이젠 이런 식으로는 그만 만나고 싶어요. 지금은 볼일이 있어서 외출하는 길이고, 정식으로 날을 잡아 자세하게 이야기합시다”라고 정중하게 말하며 차에 올라탔다. 기자가 다시, “신간을 읽었다. 경제학자로 재기하는 것 같아 보기 좋다. 더 빨리 만나고 싶어서 찾아왔다”고 하자 그는 관심을 보이며, “따로 연락을 주세요. 출판사 쪽으로 연락을 하면 돼요. 김oo 대표라고 있어요. 그분이 일정 정리를 다 하시니까. 제가 거기 통해서 연락을 드릴게요.”라고 답하고는 자리를 떴다.
그가 떠나고 얼마 후 아내 박미애 씨가 대문을 열고 나왔다. 그녀 역시 집을 나서는 길이었다. 변 씨와는 달리, 그녀는 경계의 표정이 역력했다. “무슨 일이시냐. 할 말이 없다. 지금 굉장히 바쁘다. 시간이 없다”며 걸음을 재촉해 주차장으로 향했다. 변양균은 이번 책에서 아내에 대한 언급을 꽤 많이 했다. 힘든 시절 그의 곁을 지켜준 아내에 대한 고마움을 직접적으로 표현했다. 그래서 기자는 “책에 아내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언급됐더라. 좋은 말씀이 많아서 마음이 좀 녹으셨을 것 같다. 읽어보셨느냐”고 말을 건넸다. 어떤 질문에도 “바쁘다”, “할 말 없다”만 반복하던 그녀는 그제야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럼요. 책을 냈는데 당연히 읽죠, 안 읽어요? 읽었습니다.”라고.
# 부모님 다음으로 나를 아껴준 사람, 노무현
참여정부 시절 못다 한 이야기 풀고 싶다
그가 책을 낸 이유는 명확하다. 참여정부에 대한 애정과 아쉬움 때문이다. 본인의 개인적인 문제가 노무현 정권에 치명타를 안겼다. 때문에 지금이라도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진 마음의 빚을 갚고, 노 전 대통령의 경제정책에 대한 재평가의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책을 집필했다. 무려 3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변양균 때문에 참여정부가 무너졌다”는 말보다는 “노무현 대통령이 경제를 망쳤다”는 말에 대한 오해를 없애고 싶었다.
그는 책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각별한 마음을 털어놨다. 2007년 가을 ‘신정아 사건’으로 사표를 내던 날, 노무현 대통령이 “관저 뒷산으로 같이 산책이나 가자”고 했다고 한다. 관저 뒷산 숲속에 있는 벤치에 단둘이 앉아 위로의 말을 건네받았다. “제일 상처받을 사람이 부인이니, 부인을 잘 위로해드리세요.” 누구보다 신임했던 그의 추락에 속상해하던 대통령. 가슴 아파할 그의 부인을 위로하기 위해서 권양숙 여사에게 부탁해 따로 불러 격려하라는 인간적인 위로를 했던 사람이다.
그는 개인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었다. 감옥에서 풀려난 게 2008년 3월 31일. 이후 낙향한 노무현 대통령이 봉하에 한번 들르라는 전갈을 세 번이나 전했는데, 가지 못했다. 사법 절차가 마무리돼 명예도 회복하고 조금 덜 죄송한 상황에서 뵙고 싶었다고 한다. 그런데 노 대통령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봉하에 차려진 빈소에서 장의위원 자격으로 문상객을 맞으면서 그는 부끄러웠다고 했다. 억울하게 떠난 대통령과 남아 있는 사람들을 위해 자신이 지금까지 한 일이 무엇이었는지 돌아봤고, 앞으로는 무엇을 할 것인지 고민했다. 자책은 빈소를 서울로 옮겼을 때까지도 계속됐다.
그래서 그는 이 책에서 참여정부의 정책을 이야기한다. 경제를 망쳤다는 공격을 당하고 외롭게 떠난 대통령에 대한 예를 지키고 싶어서다. 이 책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정에 바치고 싶다는 그는, 책이 나오기 전에 봉하마을에 다녀왔다. ‘부족한 제가 책을 냈습니다. 받아주십시오’라고 적은 책을 묘소에 한 권 올렸다.
# 내 생애 유일한 시련, 신정아
모든 것이 불찰이고 뼈아픈 잘못이다
공식 활동을 시작하면서 피할 수 없는 두 번째 이름이 있다. 신정아다. 지난해 자서전에서 본인을 언급한 그녀를, 아니 그보다도 희대의 스캔들로 공직자인 그의 명예를 물거품처럼 없애버린 그녀를, 그는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법원에서 신정아와 관련된 모든 문제에 대해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사람들에게 그는 여전히 신정아의 남자다. 이번 책 출간 관련 기사에서도 경제학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신정아와 관련된 이야기가 더 많았다. 질긴 인연이지만, 피할 수 없는 운명이 되어버렸다.
그는 책의 서문과 후문에서 신정아에 대해 공식적으로 언급했다. 신정아가 책에서 ‘똥 아저씨’ 등의 애칭과 함께 은밀한 이야기까지 폭로식으로 쓰면서 그의 이야기를 비중 있게 다룬 데 반해, 그는 ‘신정아 씨’라는 간단한 표현을 쓰면서 그녀에 대한 선을 명확하게 그었다. 더 이상 과거사로 얽매이지 않겠다는 의지다. “내 생애 유일한 시련이었으며 가장 큰 고비였다. 나의 불찰이고 뼈아픈 잘못이었지만, 그 결과가 그리 참혹할 줄 몰랐다는 것이 더 큰 불찰이고 잘못이었다.”
출판사에 의하면 신정아 씨를 언급한 부분은 변 전 실장이 결정한 부분이라고 한다. 아무런 편집 없이 그가 쓴 내용이 그대로 들어갔다. 그는 이제 앞으로는 누구를 탓하고 누구를 원망하지 않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경제전문가로서의 삶을 시작하기로 한 이상, 그의 인생에서 그녀는 더 이상 언급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다.
# 마지막까지 나를 지켜준 사람, 아내
함께 예배드리며 서로의 버팀목이 되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말이 맞았다. 그 사건이 터졌을 때, 가장 힘들었던 사람은 아내 박미애 씨였다. 대검 중수부에서 파견된 검사를 포함해 수십 명의 검사와 수사관이 30여 차례의 검찰 소환조사를 진행했다. 조사시간이 10시간이 넘는 것은 예사였다. 박 씨는 근거 없는 소설이 난무할 때 마지막까지 그를 지켜주고 이해해준 사람이다. 주변 사람들에게 "내가 (내 남편에게) 야단칠 일을 가지고 왜 국가가 나서서 야단인지 모르겠다"고 말하고 다니면서 그의 곁을 든든하게 지켜줬다. 혹여 사람들이 그녀를 위로한답시고 신정아를 탓하면, "정도 이상으로 지나친 고생을 하고 있지 않느냐? 너무 욕할 필요 없다"고 말하면서 오히려 그를 두둔해줬다.
아내가 어떤 사람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기에, 그는 “아내가 없었으면 지금까지 올 수 없었다”고 말한다. 오랜 기간 사람을 만나는 일조차 두려운 시간을 보냈다. 스스로를 받아들이는 것조차 힘들었다. 아내가 아니었다면 다시 일어서기 힘들었을 것이다. 아내는, 늘 곁에서 큰 힘이 돼줬다. 큰 시련 없이 평탄하게 살아왔던 삶. 아내가 묵묵히 뒷바라지를 했다.
아내가 먼저 몸을 추슬렀고, 아내가 먼저 그를 일으켜 세우고자 했다. 불교 신자였던 그는 이번 사건을 겪으면서 종교도 기독교로 바꿨다. 주말이면 아내와 함께 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린다. 종교와 관련된 책을 읽고 가정에 충실한 삶을 사는 요즘이 그는 참 소중하다. 지금까지 함께 살아온 아내와의 시간보다, 지금 함께하고 있는 시간이 더 소중하고 의미 깊은 시간이라고 한다.
# 첫 번째 재개 프로젝트 '변양균.com'
시민들 생각 모아 정책 이야기 나누는 장 열고파
책을 계기로 그는 경제전문가로서의 삶을 시작할 계획이다. 첫 번째 프로젝트로 그의 이름을 딴 블로그를 운영하는 것이다. 'www.변양균.com.' 이왕 세상에 나오기로 한 만큼, 본인의 이름을 아예 사이트 주소에 넣어 임팩트를 심어줬다. 이 공간에서 시민들의 생각을 모아가는 것이 첫 번째 목표다. 누구나 참여해서 아이디어를 공유하고, 토론을 통해 제대로 된 소통을 하고 싶다고 한다.
다양한 정책을 제안하고, 필요한 사람은 누구나 활용하라는 것. 그는 본인의 블로그를 시민사회가 정책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주는 통로로 만들고 싶어 한다. 캐치프레이즈는 ‘옴니프레젠트 레볼루션(Omnipresent Revolution)’. 온라인, 오프라인 상관없이 세상을 바꿔보자는 의미다. 노무현의 따뜻한 경제학과 관련한 독자와의 대화 코너, 정책 컨설트, 영화와 경제 이야기, 비전 2030, 시민들의 정책 제안으로 구성되어 있다. 책 출간일과 동시에 오픈된 사이트에는 3일 만에 1만6000명이 넘게 다녀갔다. 그가 고백한 대로, 여기까지 오는 게 쉽지 않았을 것이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그가 만든 이 공간에서 어떤 정책의 소통이 이루어질지 지켜볼 일이다.
세상 발칵 뒤집었던
‘신정아·변양균 사건’은?
2007년 7월. 신정아 전 동국대 교수가 학위조작 논란에 휩싸였다. 그로부터 한 달 뒤 청와대 정책실장으로 있던 변양균 전 실장이 신 씨 사건을 무마시키려 시도했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이 사건은 두 사람의 스캔들로 번졌다. 신 씨는 동국대 교수에 임용된 혐의(업무 방해)와 성곡미술관 공금을 빼돌려 개인적으로 쓴 혐의(업무상 횡령) 등으로, 변 전 실장은 개인 사찰인 울주군 흥덕사에 특별교부세를 지원하도록 압력을 행사한 혐의(직권남용 권리행사 방해) 등으로 구속됐다. 이후 1심에서 신 씨는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은 반면, 변 전 실장은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과 사회봉사 160시간을 선고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