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모든 여자들을 혐오했던 남자, 차라리 '그녀'를 직접 만들기로 했다. 바로 키프로스의 왕 피그말리온이다. 버나드 쇼는, 자신이 만든 조각상 갈라테이아와 사랑에 빠졌다는 피그말리온 신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여 걸출한 희곡을 썼다. 1964년 제작된 오드리 헵번 주연 영화 '마이 페어 레이디'<사진>는 그 희곡을 각색한 작품이다.

'마이 페어 레이디'는 흔히 헵번의 깜찍한 연기로 회자되지만 이 서사의 진짜 주인공은 명백히 '피그말리온'이다. 언어학자 헨리 히긴스 교수(렉스 해리슨)는 거칠고 교양 없는 말투를 사용하는 거리의 여인이라도 교육만 잘 시킨다면 우아하고 세련된 귀부인으로 재탄생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교육의 힘은 과연 위대하다. 무지렁이 여자는 철저하고 혹독한 조련에 따라 서서히 과거의 모습을 버리고 마침내 성공적으로 변신한다. 완성된 피조물이 히긴스가 가진 미적 취향의 집대성임은 불문가지. 남자는 뿌듯한 성취감과 함께 창조주의 지위를 획득한다. '프린세스 메이커'처럼 캐릭터를 직접 성장시키는 육성 시뮬레이션 게임을 해 본 현대인에게도 낯설지 않을 감정이다.

그런데 의문점 한 가지. 영혼이 생긴 피조물 갈라테이아가 과연 자유의지에 의해 창조주 피그말리온을 사랑하게 되었을까? 원작 희곡의 결말과는 달리 영화는 권위적이고 제멋대로인 남자 히긴스가 일라이자의 사랑을 얻는 것으로 끝난다. 분명한 것은 사랑이 이루어진 순간부터 피그말리온의 동반자는 '언어'가 없는 조각품이 아니라 한 명의 인간이라는 사실이다.

인간은 누구나 뜨거운 피와 세치 혀, 격변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 자고 일어나면 구취도 난다. 피그말리온 커플의 생활이 새삼 궁금해지는 이유다. 혹시 각자의 방에서 각자 새로운 조각에 열중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 물론 기우(杞憂)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