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속 사람들은 내가 혼혈인 것도, 말투가 이상한 것도 전혀 몰라요."
초등학교 5학년인 정현수(가명·11·경기 안산시)군은 엄마가 중국인인 다문화 가정 어린이다. 정군에게 학교 친구는 거의 없지만 게임 속 친구들은 많다. 고민도 게임 속 친구들에게 털어놓는다. 정군은 "(게임에서 만난) 친구들에게는 나도 똑같은 한국인"이라고 했다.
정군은 초등학교 3학년 때 한국말을 잘 못한다는 이유로 따돌림을 당했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학원에도 못 다닌 정군은 학교가 끝나면 곧장 집으로 와 밤늦게까지 7시간 넘게 게임만 했다.
온라인에는 국경이 없다. 얼굴색도, 어눌한 말투도 드러나지 않는다. 게임 레벨(게임 실력 수준)과 아이템만이 있을 뿐이다. 다문화 가정 어린이들이 온라인 게임에 빠져드는 이유다. 한국정보화진흥원의 2010년 조사에 따르면 다문화 가정의 인터넷 중독률은 37.6%로 일반 가정(12.3%)의 세 배 이상이었다. 인터넷 사용 청소년의 65.2%가 게임을 하기 위해 인터넷에 접속하는 점을 감안하면 다문화 가정 어린이 10명 중 두 명 이상이 게임 중독인 셈이다.
우즈베키스탄 출신 엄마를 둔 김진혁(가명·9)군도 친구를 사귀기 위해 게임을 한다. 김군의 엄마는 하루 종일 컴퓨터만 잡고 있는 김군에게 "밖에 나가 친구들과 놀아라"며 나무란 적도 있지만 "나도 왕따당하면 어떻게 해"라며 우는 아들을 본 뒤로 억지로 떼어놓지 못했다. 게임시간을 줄이려고 방과 후 학교와 태권도 학원에 등록도 해봤지만 김군은 갖은 핑계를 대며 조퇴·결석을 하고 집에 돌아와 게임만 했다.
사회 적응이 어려운 탈북자 가정의 아동·청소년들도 게임 중독에 빠져들고 있다. 1년 전 하나원을 수료하고 서울의 한 일반 중학교 2학년 과정에 입학한 박중재(가명·16)군은 학교가 끝나면 하나원에서 만난 친구들과 PC방으로 간다. 박군은 북한에서 게임을 해본 적 없었지만 PC방에 다니며 실력이 부쩍 늘었다. 하루에 6~7시간 게임을 하느라 PC방비를 감당하기 힘들어지자 어머니를 졸라 컴퓨터를 샀고, 더욱더 게임에 빠져들었다. 현실 적응이 너무 힘들었던 박군의 어머니는 게임 중독의 무서움을 몰랐다. "아들이 한국 생활과 학교에 적응하기 힘들어 그러려니 했다"고 말했다.
박군은 게임 중독 증상이 점차 심각해져 학교에서 잠만 자고 수업 진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박군은 "나이도 많고, 북한에서 왔다고 수군대는 아이들 때문에 학교에서 견디기가 힘들었다"며 "온라인에서 만나는 친구들은 내가 어디 출신인지 알지 못하고 신경 쓰지도 않아 좋다"고 말했다. 박군은 결국 기숙사 시설이 있는 탈북청소년 대안학교로 옮겨 중독 치료를 받고 있다.
교육과학기술부와 통일부 조사 결과 국내 초·중·고교에 다니는 탈북자 학생 1500여명 중 지난 4년 사이 256명이 학업을 중단했다. 학업 중단자 네 명 중 한 명은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이 이유였다. 전문가들은 이들 대부분이 게임 중독일 가능성이 크다고 말한다.
박경호 언어심리치료실의 박경호 원장은 "(탈북 가정이나 다문화 가정의 학생들은) 대인관계에서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성취가 즉각적으로 인정되는 게임에 빠져들기 쉽다"며 "게임에 빠지면 사회성과 대인관계가 더 나빠지는 악순환의 고리에 빠진다"고 설명했다.
설동훈 전북대 사회학과 교수는 "다문화 가정은 일반적으로 맞벌이가 많고, 경제적으로도 어려운 저소득층이 대다수라 아이들이 방치되기 쉽다"고 말했다. 고려대 사회학과 김문조 교수는 "다문화 가정, 탈북자 청소년들이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채 게임만 하고 있는데 비행이나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다고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 봐야 한다"며 "정책 차원뿐 아니라 의식 수준에서 이들을 포용해야 게임 중독문제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