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릉 실록
이규원 지음 | 글로세움 | 576쪽 | 2만7000원
조선 제22대 임금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굶겨 죽인 할아버지 영조(제21대)를 죽을 때까지 미워했다. 골수에 사무친 정조의 원한은 영조의 묏자리(경기도 구리시 동구릉로 197번지)가 그대로 보여준다. 원래 영조는 부왕(父王) 숙종이 영면한 서오릉 안 명릉 가까이 묻히길 원했다. 그러나 정조의 뜻에 따라 동구릉에 묻혀야 했다. 제17대 효종이 안장됐다가 석물에 금이 간다는 이유로 파묘됐던 자리였다. 사가에서조차 파묘한 묏자리는 기가 다했다 하여 쓰지 않는 법. 그러나 정조는 할아버지 능지를 굳이 그곳으로 정했다. 반면 경기도 양주의 흉지에 있던 사도세자 묘는 경기도 화성으로 이장해 지성으로 보살폈다. 매해 능행 때는 소를 잡아 인근 백성을 배불리 먹였다. '수원왕갈비'가 여기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500년이 넘는 왕실의 무덤이 단 한 기도 훼손되지 않은 채 보존된 사례는 조선 왕릉이 세계에서 유일하다. 저자는 조선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부터 마지막 황세손 이구의 묘까지, 흙으로 돌아간 조선 왕과 주변 왕족의 무덤 49기를 발로 찾아가 이야기를 입혔다. 국내에 있는 조선 왕족의 무덤은 모두 119기다. 능(陵)이 42기, 원(園)이 13기, 묘(墓)가 64기인데, 42기 능 가운데 40기가 남한에 있다. 남한의 40기는 200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사실을 절감하게 하는 것이 광해군(15대)의 묘다. 그는 살제폐모(殺弟廢母)를 서슴지 않은 패자(悖子)이기는 하나, 임진왜란이라는 초유의 국란을 겪으며 산전수전을 몸으로 익힌 능수능란한 임금이기도 했다. 탁월한 외교술을 발휘했고, 조총 제조술을 습득하는 등 여러 치적을 남겼다. 그러나 경기도 남양주시 영락교회 공원묘지 내 비탈진 산기슭에 있는 그의 묘는 초라하기 짝이 없다. 봉분 바로 앞이 급한 낭떠러지라 나뒹굴기 십상인 데다 석물조차 보잘것없다. 저자는 "산 감옥이 따로 없다. 멀쩡한 가문도 이런 곳에 묘를 쓰면 손이 끊어지는 자리인데, 혼령이라도 굽어보고 있다면 얼마나 애통할까 싶다"고 탄식한다.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의 온릉(溫陵)에는 한 여인의 한이 서려 있다. 제11대 중종의 원비 단경왕후가 영면한 곳이다. 단경왕후는 나이 열셋에 한 살 어린 중종과 가례를 올렸다. 7년 후, 중종이 연산군을 내쫓은 반정에 의해 왕위에 오르자, 왕후는 친정아버지가 반정 세력에 등을 돌렸다는 이유로 책봉 7일 만에 폐출됐다. 새 왕비와 후궁 사이에서 9남11녀를 본 중종이었으나, 저녁노을이 질 때면 인왕산 쪽을 바라보며 슬픔에 잠겼다고 한다. 단경왕후가 살던 곳이 인왕산 중턱이었기 때문이다.
일반인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사학도들에게조차 생소한 '왕'이 있으니, 바로 진종이다. 영조의 장남으로 7세에 세자로 책봉된 뒤, 10세 때 장가가던 날 설사를 앓기 시작해 두 달 만에 세상을 떠난 효장세자다. 장남이 백약이 무효로 사경을 헤매자, 영조는 곤룡포를 벗어던지고 그를 끌어안은 채 "왕위라도 내놓을 테니 세자만은 구해달라"고 울부짖었다. 그가 종묘사직과 억조창생을 위해 한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하지만 조선 말기 7대 황제 중 첫 번째인 진종소황제로 추존돼, 경기도 파주시 조리읍 132만3105㎡(4만239평)에 달하는 파주삼릉에 누워 있다. 정조가 그를 진종대왕으로 추존하면서 원이 능으로 격상됐고, 황제 등극 이후 이전 왕과 왕비를 황제와 황후로 추존해 황실 계보를 세우려던 고종의 의지에 따라 '황제'로 격상된 것이다.
책은 단순한 무덤 답사기가 아니라, 500년 사직의 영욕을 통해 현재와 미래의 우리를 돌아보게 하는 이야기의 보고(寶庫)다. 왕권을 얻기 위해 형제, 부부, 부자, 모자지간에도 가차없이 칼을 휘둘렀던 혈해(血海)의 역사를 따라가노라면 '구중궁궐의 곤룡포가 삼간모옥의 베적삼만 못하다'는 옛 어른의 말씀이 절로 떠오른다.
▲21일자 A23면 '설사하다 죽은 세자…' 기사 중 '…중종이 광해군을 내쫓은 반정…' 부분에서 '광해군'을 '연산군'으로 바로잡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