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콘(Icon)이 고대의 유물이라고요?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2000년 교회 영성(靈性)의 보물창고입니다!"

서울 충정로 천주교 서울대교구 이콘연구소 소장 장긍선(49·예로니모) 신부는 펄쩍 뛰었다.

유럽이나 러시아의 성당·박물관 등에서 만나는 무뚝뚝한 표정의 성화(聖畵), 이콘. 원래 그리스어로 모상(模像) 혹은 형상(形像)이라는 뜻이다. 이 단어에서 나온 영어 단어 아이콘(icon)은 '특정한 사상·생활방식 등을 상징하는 존재'라는 의미를 갖게 됐다.

장 신부는 "이콘을 그리고 묵상하는 과정은 신학 공부나 영성 수련과 마찬가지로 하느님과의 깊은 대화와 일치로 가는 훌륭한 통로"라고 말했다. 까다로운 조건은 유명하다. 인간적인 표정이 없어야 하고, 푸른 색은 신성성(神聖性), 붉은색은 피 혹은 어머니, 예수 오른쪽은 성모 등의 규칙은 이콘을 자칫 딱딱하게 보이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초대 교회 이후 2000년간 세상이 복잡해진 만큼 성화도 복잡해졌습니다. 이콘에는 초대 교회 성도들이 보고 느꼈던 그대로의 단순함과 절제미가 살아 있습니다." 장 신부는 1997년부터 4년 반 동안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신학교의 이콘 교사 양성 과정, 비잔틴 전례 과정을 마친 국내 최고의 이콘 전문가다.

그렇지만 이콘은 정교회의 상징처럼 여겨온 것도 사실. 연구소가 천주교서울대교구 평신도 단체로 공식 인준받은 것도 1년밖에 안 됐다. 2003년 연구소가 설립된 뒤론 벌써 9년이 흘렀고, 그동안 3년 과정의 이콘 성화작가 양성 9기수에 150여명의 '이콘 화가'를 배출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이콘연구소 소장 장긍선(49) 신부가 19일 자신이 그린 성모자상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장 신부는“절제된 침묵과 기도 속에 만나는 이콘은 신학 공부나 영성 수련과 마찬가지로‘하느님과의 일치’를 향한 통로”라고 했다.(왼쪽 사진) 이콘을 그릴 때 사용하는 붉은색 안료인‘주사(朱砂·오른쪽 위)’, 한국의 순교성인 성(聖) 손자선(1858~1886) 토마스의 이콘.(아래)

장 신부는 누나 셋이 수녀로 '출가'하고, 작은할아버지와 삼촌까지 삼대째 신부를 배출해낸 독실한 가톨릭 집안의 4남6녀 중 막내. 서울 흑석동 성당 유치원을 다닐 때 당시 본당 주임신부였던 고(故) 김옥균 주교에게 크레용으로 초상화를 그려 선물했을 정도로 어려서부터 미술에 소질을 보였다.

신학교에 입학해 전례(典禮)를 전공으로 선택하면서 가톨릭 전례의 뿌리인 동방교회 전통과 이콘을 깊이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는 동방교회의 예식과 이콘의 관계를 설명했다. 예수 탄생 이콘 앞에서 성찬 예식을 준비하고, 사제는 제대가 있는 지성소(至聖所) 안에서 성체를 축성한 뒤 사복음서를 기록한 성인과 성모 수태고지(受胎告知) 장면이 그려진 '왕의 문'을 열고 영성체를 기다리는 성도들 앞으로 나온다. 그 문이 열리는 순간 신약시대, 인류 구원의 시대가 시작되는 것. 예식을 마치고 성당 문을 나설 땐 출입문 위의 최후의 심판 이콘을 만난다. 다시 죄 속으로 돌아가지 않도록 경각심을 주는 것이다. 전례의 모든 순간이 이콘이 가진 의미와 밀접하게 연관돼 있는 것이다. "단순한 성화가 아니라 영적 생활을 이끌어주는 길잡이죠."

장 신부는 "이콘은 정교회의 전유물이 아니다. 11세기 동·서방 교회 분열 이전부터 이어져 온 그리스도교의 전통"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이콘은 번뜩이는 아름다움을 가진 그림이 아니라 오랜 침묵과 기도 속에 바라보는 성화입니다. 성화에 대한 공경 역시 성화 자체가 아닌 그 원상(原像)에 대한 공경이고요. 처음에는 좀 딱딱하게 느껴지지만 내용과 근거의 묘사가 철저히 성서와 교리를 바탕으로 하고 있어 간결하고 주제가 확실하게 부각되지요. 눈으로 읽는 성서라고 할 수 있어요."

단순해보이는 이콘이지만 보통 한 점을 그려내는 데 여섯 달 정도가 걸린다. 목판에 아교를 먹이고 천을 입혀 회반죽을 올리는 데 한 달, 보석과 돌을 갈아 계란 노른자와 백포도주에 개서 채색하는 데 서너 달, 금박과 표면 보호 처리에 한두 달이 훌쩍 간다. 이콘 성화작가 양성 과정에 열심이던 사람들도 견디지 못하고 절반 정도는 중도에 탈락한다. 장 신부는 "이런 과정 자체가 도 닦는 것과 같아서 웬만한 인내심으로는 되지 않는다"며 웃었다. "이콘은 베끼는 그림이 아닙니다. 형상은 비슷해도 개인의 기도와 영성이 녹아들어 가기 때문에 같은 그림은 없지요. 동양에서 혼이 녹아 있다는 표현과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