굉장한 '괴물'이 있다고 해서 만나러 갔더니, 해사한 청년이 웃고 있었다.
지난 14일 서울 중구 남산아트센터에서 만난 극작가 김지훈(32)은 "비장하게 두근거린다"고 말했다. 2008년 장장 5시간짜리 연극 '원전유서'(연출 이윤택)로 연극계를 발칵 뒤집어놓으며 '괴물 작가'로 불리게 된 그다. 창작극 사상 최장 공연이었던 '원전유서'는 쓰레기 매립지에 사는 사람들을 보여주려고 5t 트럭 3대분 쓰레기를 무대에 엎어놓고 시작했다.
이번에는 4시간짜리 '풍찬노숙'(연출 김재엽)이다. 희곡만도 100쪽. "왜 이렇게 길어야만 하느냐"고 물었더니 "점점 짧아지고 빨라지고 작아지는 세상에, 길고 느리고 큰 것을 던져보고 싶었다"고 답했다.
'풍찬노숙'은 그의 신작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연극계를 설레게 했다. '얼굴은 마이클인데 이름은 응보'인 동남아 혼혈족 이야기다. 제작을 맡은 남산예술센터는 18일 개막을 앞두고 14일 최종 마무리 연습 공연을 본지에 공개했다. 자신들의 역사를 세우겠다는 혼혈족 백만대군이 피를 뿌리듯 던진 붉은 연판장이 하늘 가득 날리는 마지막 부분은 끝내 꺾지 못할 진심의 회오리인 양 뜨겁고 황홀했다. 이날 연습은 2막이 예정보다 길어져 4시간30분 가량 걸렸다. 김씨는 "음악이나 배우 동선 등은 개막 때까지 보완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이번 공연은 무대와 관객석을 뒤바꿨다. 경사진 관객석을 배우들이 오갈 언덕으로 만들었다. 그 언덕에는 혼혈족에게 금기의 대상으로 각인된 북이 있다. 북을 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 '혼혈족의 홍길동'인 응보. 유달리 두뇌가 비상해 "응보가 타온 상장을 달인 물만 먹어도 수재가 된다"는 소문에 동네 사람이 집 앞에 장사진을 친다. 그러나 혼혈족이니 아무리 머리가 좋아도 무소용이다.
김씨는 경남 언양의 흙길을 걷다가 작품의 착상을 했다. "어미인 듯한 동남아 여성이 아들로 보이는 콩만한 사내아이 손을 잡고 걸어갔어요. 아이 입에서는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가 쏟아지는데, 어미는 우리말이 서툴고 어눌했죠. 그 부조화가 실로 충격적이었습니다. 그 순간 홍길동을 떠올렸고, 차별의 세상을 직감했습니다."
2004년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돼 등단한 김씨는 한 연극을 본 후 희곡을 쓰게 됐다. 너무도 감동받아서? "하도 형편없어서요.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이었는데, 뿔 달린 비닐 옷을 입고 춤을 추더군요. 그걸 새롭다고 하다니, 반항심이 생기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충천한 '반항심'으로 쓴 희곡 '양날의 검'으로 그는 2005년 대산문학상을 받았고, 연출가 이윤택의 눈에 띄어 '원전유서'도 올렸다. "('3월의눈' 등을 쓴 극작가) 배삼식 이후 이만한 깊이와 넓이, 힘까지 좋은 극작가의 등장은 처음"(연극평론가 김윤철)이라는 등 상찬이 쏟아졌고, 대한민국연극대상 작품상 등 여러 연극상을 휩쓸었다.
'풍찬노숙'에서 자신들만의 역사를 만들려던 혼혈족의 봉기는 처참할 정도로 허무하게 실패한다. "억지로 만드는 역사가 값어치를 한다면 옳은 것이 아니니까요. 혼혈족의 역사를 따로 쓸 필요가 없이, 순혈족과 같은 역사로 인정받아야 밝은 세상이지 않겠습니까."
그는 트위터 자기소개에 '원전유서는 이제 그만, 지금쯤은 풍찬노숙'이라고 적었다.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면 쓰지 않겠습니다. 한번 썼던 것은 과감하게 버리고 전진할 겁니다. 그러지 못하면 극작가를 못 한다는 각오입니다."
▲'풍찬노숙' 18일~2월 12일, 남산예술센터, (02)758-21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