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000리
이병천 장편|다산책방|302쪽|1만3000원
발단은 '민족주의적 상상력' 혹은 '아전인수적 상상력'이었다. 2000년 전 저 멀리 유대 땅 베들레헴으로 찾아갔던 동방박사가 만약 한반도에서 출발한 고조선 유민이라면 어떨까. 198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작가 이병천(56)의 장편소설 '90000리'는 얼핏 터무니없이 들리는 이 헐거운 상상력의 그물에 촘촘한 논리적·역사적 고리를 이어보려는 문학적 시도다.
패망한 중국 묵가(墨家)의 잔존 세력설(說) 등 동방박사가 사실은 동양에서 떠났을 것이라는 주장은 전에도 있어 왔다. 아기 예수를 만난 동방박사가 동쪽에서 왔다는 설명을 제외하면 스스로를 소개한 명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비롯된 상상력이다. 작가의 발상도 같은 지점에서 출발한다. 유대왕 헤롯이 두 살 이하 사내아이를 죽이라고 한 명령을 고려해보면 박사들이 찾았을 때 예수의 나이는 한 살에서 두 살 사이였을 것이라는 점. 그렇다면 예수 탄생 1년이나 지나 도착했다는 것은 그 물리적 거리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다. 그 정도 시간이 걸릴 거리라면 어디쯤일까 하는 상상력이다.
작가는 이 대목에서 고조선 유민을 떠올렸다. 태평성대 구가하는 다른 나라 점성술사가 아니라 오매불망 아사달을 되찾기 위해 하늘의 신탁을 알아보려는 간절한 배달민족. 그러고는 한반도 서북쪽 중국 갈석산 인근에서 베들레헴까지 이 유민들을 떠나보낸다. 장안·둔황·옥문관·타클라마칸 사막을 거쳐 산 넘고 물 건너, 길 열고 때로는 만들며 걸어야 했던 3만6000㎞. 두 발로 꼬박 20개월이 걸렸던 90000리다. 실존 인물인 고조선 제사장 성기와 남에게 맡겨 길렀던 용맹한 아들 그리메, 가녀린 천무(天巫) 달하. 여기에 패망한 흉노족 출신 장수 융커와 아라비아 상인 에데사 등이 등장인물. 이들을 중심으로 작가는 스스로 천손이라 믿었던 우리 선조들의 신앙과 새로운 별 하나가 휘황하게 빛났던 예수의 탄생, 목수 요셉이 지니고 다녔던 곱자(尺)와 조선 건국 직전 이성계 꿈에 나왔다는 금빛 자(夢金尺), 선교사보다 성경을 먼저 들여오며 세계에서 유래를 찾기 힘들 만큼 자발적으로 천주교를 도입한 조선 후기 역사 등 한반도와 유대 사이의 시간적·공간적 격차를 줄여나간다. 캐릭터의 평면성이 조금 아쉽지만 꼼꼼한 각주와 성실한 역사 공부를 바탕으로 빚은 매혹적인 90000리 대서사시다.
입력 2012.01.14.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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