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직업의 역사
이승원 지음 | 자음과 모음|248쪽 | 1만3500원
국문학자 이승원(41)씨는 '선데이서울'을 읽듯 '대한매일신보'를 읽었다고 한다. 그의 연구 대상이자 '놀이터'는 구한말·일제강점기의 신문과 잡지다. 옛날 신문의 '사회면' 기사는 당시의 일상을 포착할 수 있는 보물창고였다.
'사라진 직업의 역사'는 그가 빛바랜 옛날 신문, 잡지를 뒤져가며 찾아낸 우리의 자화상이다. 전화교환수, 변사, 기생, 전기수, 유모, 인력거꾼, 여차장, 물장수, 약장수 등 근대 초기에 등장했다가 사라진 직업들을 통해 근대적 삶의 흔적을 돌아본다.
1907년 5월 10일 저녁 8시 고종은 식구들을 이끌고 덕수궁 중명전에서 활동사진을 관람했다. 스케이트, 해수욕장 풍경, 수병이 수영하는 모습 등 20여종의 필름이었다. 이때 전무과(電務課)기사 원희정이 영화를 해설했다. 191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활동하는 변사의 선구자인 셈이다. 영화는 일제 시기 대중들이 선호한 오락 중의 하나였다. 1927년에 이르면 영화 관객은 260만명이었고, 1935년엔 880만명에 육박했다. 이런 영화붐을 타고 등장한 변사는 당대의 스타였다. 무성영화시절인 1930년대 중반까지 변사는 줄거리 소개와 대사 더빙, 몸짓 연기까지 해냈다.
사극은 김덕경, 문예극은 서상호와 우정식, 활극은 이병조, 희극은 최병룡, 연애극은 김영환 식으로 '전공'이 있었다. 대우도 좋았다. 1930년대 최고 스타배우였던 문예봉이 월급 40~50원을 받을 때 일류 변사는 70원을 받았다. 그들의 밥줄을 끊은 건, 발성영화였다.
인력거꾼의 운명도 굴곡이 크다. 일본이 메이지시대에 개발한 교통수단인 인력거는 1885년 영국, 프랑스 등 유럽에까지 수출한 신(新)발명품이었다. 이 인력거가 1890년대 국내에 수입됐는데, 대한제국 고관과 부자들이 주로 이용했다. 인력거는 당시 '모던'한 교통수단이었다. '모던 보이', '모던 걸'은 양복과 양장 차림에 인력거를 타고 시내를 누볐다.
1923년 전국 인력거는 총 4600여대였고, 이듬해 경성시내에서 운영된 영업용과 자가용 인력거만 1997대였다. 현진건 단편 '운수좋은 날' 주인공에 등장할 만큼 인력거꾼은 흔한 직업이 됐다. 그러나 소설에서처럼 인력거꾼은 대부분 하층민이었고 그들의 삶 또한 고단했다. 여기에 7전짜리 버스와 1원짜리 택시가 생기고 전차가 늘어나면서 인력거는 구시대의 퇴물로 몰렸다. 1931년 택시요금이 시내 균일 80전이 되자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 명맥만 유지한 채 내려오다 1969년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이야기책을 읽어주는 낭독 전문가 '전기수'(傳奇�o), 등유 깡통으로 만든 물통을 지고 다녔기 때문에 '깡꾼' 혹은 나무로 만든 물통을 지고 다녀서 '통꾼'이라고 불린 물장수, 시장의 만능 엔터테이너 약장수까지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 만나는 옛 풍경이 정겹다. 지난 100년간 한국인이 통과한 시대를 다양한 시각과 디테일을 담아 가볍게 보여주면서 책을 읽는 재미까지 갖췄다.
입력 2012.01.14.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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