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동의 변죽딴죽] "밤이다.
침대곁에서 병든 어머니를 간호하던 아들은 고단하여 잠이 들었다.
장미색 빛이 차차 실내를 밝히우고 멀리서 음악이 들려온다.
빛과 음악은 시나브로 가까워져서 이내 왈츠의 멜로디가 귀에 들린다.
자고있던 어머니는 눈을 뜨고 침대에서 일어나 무도복과 비슷한 길고 하얀옷으로 서서히 소리도 없이 이곳저곳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녀는 양손을 흔들며 마치 눈에 보이지않는 손님을 불러들이는것처럼 음악에 맞추어 청한다.
아들은 아연해서 그저 어머니의 춤을 바라볼 뿐이다..."

핀랜드의 극작가 아르운트 야르네펠트의 희곡 의 한 장면이다. 이 대목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춤곡인 시벨리우스의 다.

한주를 시작하는 월요일아침 한 라디오프로그램에서 를 들었다.
지난주 브라운관을 통해 숱한 부고장을 받은 뒤끝이어선지 감회가 야릇하다.

지난주는 예수의 탄생일 크리스마스로 마감했지만 일단은 죽음으로 시작됐다.
월요일인 19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죽음이 알려지면서 한주가 내리 뒤숭숭했었다.

브라운관도 마찬가지다. SBS 이 수애가 죽으며 끝났고 에선 강채윤 소이 무휼 정기준이 죽어나가며 드라마를 끝냈다. 그리고 모든 죽어가는 이들이 제각각 추었던 슬픈 왈츠들은 김정일의 죽음이 정치 경제 사회 국제를 도배했듯 문화연예란을 도배했다.

수애가 추었던 슬픈 왈츠는 정말로 슬프게도 성인용기저귀 디펜드를 차보자는 시도였다. 치매라는 불가항력의 병마가 바닥까지 갉아먹기전, 존엄한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몸짓이다. “이거 안차면 고모가 힘드셔”란 김래원의 권유를 “나 이서연이야!”란 앙칼지고 모지락스러운 대꾸로 거부했던 수애다. 그런 수애의 마지막 몸짓은 자기가 사랑하고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을 힘들게 할 수 없다는 의지에 다름아니다. 작가는 사람다운 사람으로 남겨놓은채 수애의 인생에 종지부를 찍었다.

에서 무휼은 게파이의 칼에 보디가드다운 최후를 맞고 소이는 죽어가며 치마를 찢어 훈민정음 해례본을 만들어놓는다. 강채윤은 소이의 업적 훈민정음의 반포를 죽어가며 지켜보고 라스트 안타고니스트 정기준은 “주상의 생각이 맞기를 바랄밖에”라 축원하며 죽어간다.

그렇게 떠나가는 자의 슬픈 왈츠를 지켜본 남겨진 자도 있다.
딸을 데리고 수애의 무덤을 찾은 김래원은 말한다. "난 아직 아니야". 넌 그렇게 갔지만 난 널 아직 보내지 못했어란 뜻일게다.
의 한석규는 말했다. "무휼도 없고 소이도 없고 똘복이도 없다. 이곳은 낯선 곳이다. 난 나의 일을 했다."

에서 아들은 잠에서 깨어난다. 어머니는 죽어있다. 꿈속에서 본 어머니의 슬픈 왈츠는 어머니가 보내준 마지막 위안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어머니를 떠나보내고도 잘 살아남을 아들의 무의식이 만들어낸 합리화일지도 모른다.
 
살아있다는 것은 참 슬픈 일이다. 사랑하는 이를 잃었을땐 더더욱 그렇다. 많은 드라마 영화가 그 살아있음의 슬픔을 다뤄왔다. 어떤 미망인은 비빔밥을 꾸역꾸역 밀어넣으며 눈물을 철철 흘리기도 하고 영정앞에서 재산싸움 벌이던 아들은 유품을 태우며 새삼 복받쳐 통곡하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옆자리서 들려오는 우스개에 부지불식 웃음을 터뜨리고 그 때문에 더 서러워하기도 한다.

수애의 묘소를 찾기전 김래원도 많이 웃었을 것이다. 무휼 없고 소이 없고 똘복이 없어서 낯설다는 궁궐을 거닐며 한석규도 웃는다.

그런 것이 산자의 문법이다. 사랑하는 이를 잃고도 먹고 웃고 떠들 수 있는 것. 그러다 사랑하는 이 없는 시간에 충분히 익숙해 지는 것. 산자들의 참으로 치사한 숙명이다.

이번주엔 또다른 죽음이 예정돼있다. KBS 월화드라마 의 송옥숙이 죽을 차례다. 송옥숙은 또 어떤 슬픈 왈츠를 추게될 지, 남겨진 자 신하균은 어떤 몸부림을 치게될 지 궁금해진다.
[극작가, 칼럼니스트]osenstar@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