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초 배우 서주희는 출연 제안 전화를 받았다. "뭐? 제목이 대학살? 연출이 한태숙? 게다가 박지일까지 나와? 나 절대 못 해!"

서주희를 대경실색하게 했던 연극 '대학살의 신'이 지난 17일부터 재공연에 들어갔다. 전쟁영화에나 어울릴 살벌한 제목에 깐깐한 연출자, 진지하고 심각한 배역 전문인 박지일까지 가세해 희랍 비극인 줄 알고 거절했던 서주희도 결국 출연했다. 초연뿐 아니라 재공연까지. "알고 보니 코미디더라고요. 대본을 보니 너무나 재미있어서 안 할 수가 없었어요."

'대학살의 신'에 출연하는 배우 4명을 지난 23일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만났다. 이연규·이대연·서주희·박지일 네 사람은 사진 촬영이 시작되자 전천후 표정을 만들어냈다. "얼굴은 웃고 있지만 사실은 꼬집는 거 보여요?"

배우 이대연(제일 왼쪽)이 들고 있는 꽃냄비가 서주희의 토사물이 쏟아지는 그 냄비다. 우아하게 예술서적을 넘기는 이연규, 술잔을 든 서주희, 휴대전화 통화에 여념이 없는 박지일(왼쪽부터)이 연기하는 네 사람은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현대인의 자화상이다. 23일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작품은 희고 우아한 튤립이 장식된 거실에서 두 부부가 만나면서 시작한다. 손님 부부의 아들이 집주인 부부의 아들을 때려 이가 두 개나 날아간 직후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믿는 생활용품 도매상(이대연)과 아프리카 분쟁까지 세상의 거대담론이 근심거리인 작가(이연규)가 피해 아동의 부모이고, 불량 의약품을 변호하는 변호사(박지일)와 우리집 재테크 컨설턴트라고 우기는 주부(서주희)가 가해 아동의 부모다. 프랑스 극작가 야스미나 레자 작품으로, 2009년 토니상 최우수연극상 등 3개 부문과 2010년 대한민국연극대상에서 연출상 등 2개 부문을 수상했다. 최근 로만 폴란스키 감독이 조디 포스터(이연규의 작가 역)와 케이트 윈즐릿(서주희의 주부 역)을 캐스팅해 영화로도 개봉했다.

연극은 '결정적 그 장면'을 빼고는 설명할 수 없다. 서주희가 "자기야, 나 속이 안 좋아"라며 끙끙대다가 먹었던 모든 것을 문자 그대로 '뿜는다.' 이 장면은 토사물이 최적의 순간에, 최대한 사방에 분사돼야 하기 때문에 최고 난이도 연기가 필요하다. 서주희는 "수백번 연습했다"고 말했다. 실제 토사물로 보여야 하기 때문에 순두부도 섞여 있고 죽도 들어간다. 한번은 굵은 국숫발이 입도 아니고 코로 나와서 엄청나게 고생했다고 한다.

이 장면 직후 가장 먼저 돌변하는 것은 서주희가 맡은 가해자 엄마다. 잔뜩 토해낸 그녀가 "그런데요, 모욕도 일종의 공격 아닌가요"라며 아들 변호에 나서고 "우리 아들은 니네 아들처럼 맞고 들어오진 않아!"라고 아예 공세로 돌아설 때 나머지 세 사람도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부모 대 부모 싸움이 부부 싸움으로("부부는 신이 내린 가장 끔찍한 시련이야"), 다시 남자들 대 여자들의 싸움("오늘이 제일 불행한 날이에요.")으로 진영과 전선을 바꾼다. 가면 아래 모습에 서로 놀란 그들은 말한다. "저 사람들 괴물이야."

제목 '대학살의 신'은 "나는 대학살의 신을 믿는다"는 박지일의 대사에서 설명된다. 교양으로 감추고 위선을 감쌀 수 있으나 결국에는 드러나게 돼 있는 폭력과 본성의 신이다. 보다 보면 '나도 저런 사람 알고 있어'하며 무릎을 치게 되는데, 어느 순간 돌아보면 내 얘기라 뜨끔해진다.

객석의 공감도가 높다 보니 내놓고 욕을 하는 관객까지 나온다. 지난주 공연 때 서주희의 대사가 무르익어가자 앞줄의 중년 남성이 "아이구, 저런 나쁜 사람 봤나"라며 큰소리로 꾸짖기 시작한 것이다. 옆에 있던 여성 관객도 맞장구를 치면서, 앞줄 관객이 극 전개를 온 극장에 생중계하는 상황이 됐다. 서주희는 "손가락을 입에 갖다대고 조용히 하라고 신호를 보냈는데도 어찌나 흥분하셨는지 멈추지 않으셨다"며 "그만큼 몰입하신 거니까 한편으로는 고마웠다"고 말했다. '관객 몰입'에 힘을 받은 이대연은 서주희에게 격려 아닌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 구토, 앞으로 쉰세번만 더해!"

▲2012년 2월 12일까지,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02)580-1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