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윈 폴리오가 활동한 이후 한국 가요계에 듀엣 흐름이 이어졌다. 김도향과 손창철의 '투 코리언즈', 전언수와 이태원의 '쉐그린', 오승근과 홍순백의 '투 에이스', 최기원과 윤영민의 '에보니스', 이두진과 오세복의 '둘 다섯', 백순진과 김태풍의 '4월과 5월' 등. 그 흐름 속에 등장한 팀이 이수영과 임창제의 '어니언스'였다.
어니언스를 처음 만난 건 1973년이었다. 당시 나는 의대 재학 중이었으나 영화배우 신영균씨가 소유하고 있던 서울 명동의 카페 '엠 클럽'의 운영을 의뢰받은 터였다. 그들을 불러 '엠 클럽' 무대에 세웠다. 그때만 해도 어니언스는 무명이었다.
트윈 폴리오처럼 어니언스는 상반된 두 성격이 만난 경우였다. 이수영이 귀족적이라면 임창제는 호남형이었다. 이수영의 목소리가 포근한 음색이라면, 임창제는 특이한 바이브레이션으로 고음을 맡았다. 무대 밖에서 이수영은 점잖았고, 임창제는 재미있는 입담으로 분위기를 만들었다.
어니언스는 73년 데뷔 음반을 발표하며 크게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작은 새' '편지' '저 별과 달을' '사랑의 진실' 등 음반 수록곡 거의 전부를 히트시켰다. 트윈 폴리오의 팬이 대부분 대학생이었던 데 반해 어니언스의 노래는 불특정 다수의 일반 대중에게 굉장히 쉽게 다가갔다. 통기타 문화에서 '오빠 부대'를 가장 많이 끌고 다닌 그룹도 어니언스였다.
그러나 어니언스의 성공은 그들만의 것이 아니었다. 숨은 주역이 있었다. 85년 33세의 젊은 나이에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난 김정호다. '작은 새' '저 별과 달을' '사랑의 진실' 등을 그가 썼다.
임창제와 김정호는 같이 기타를 배우던 친구 사이였다. 둘 다 수유리 달동네에 살았다. 가난할 때였다. 집에 전축이 있을 리 만무했다. 동네에 전축 있는 집을 찾아 처마 밑에 가서 집주인이 음악 틀기를 기다렸다. 그걸 듣곤 집으로 돌아와 둘이서 코드를 땄다. 그렇게 노래를 연습했다.
어니언스가 뜨고 나서 세간의 관심이 곡을 쓴 김정호에게도 쏠렸다. 그 관심을 받아 김정호는 74년 '이름 모를 소녀'를 발표하며 본격적으로 데뷔했다. 어렵게 자랐던 그의 노래엔 그만이 낼 수 있는 슬픔과 애조가 묻어나 있었다. 그의 슬픔은 우리가 노래했던 슬픔과 달랐다. 이별의 슬픔도, 가족과 헤어져서 슬픈 것도, 고향을 떠나 슬픈 것도 아니었다. '버들잎 따다가 연못 위에 띄워 놓고'란 가사로 시작하는 '이름 모를 소녀' 같은 곡에서, 슬픔이란 단어를 쓰지 않고서도 슬픔과 외로움의 정서를 자아낸 가수가 김정호였다.
마침내 인기를 끌기 시작했으나 오래가진 못했다. 1976년 1월 '대마초 파동'에 휩쓸려 모든 음악적 활동을 금지당했다. 무교동 음악 레스토랑 '꽃잎'이 그의 유일한 무대였다. 그렇게 4년이 지나고 80년 정부의 금지령이 풀렸다. 김정호는 음반 '인생'을 발표하며 재기를 시도했지만 이번엔 병마가 그를 막았다. 폐결핵이었다. 인천에 있던 요양소에 입원했다. 의사가 "6개월이면 완치될 수 있다"고 진단했으나 그는 4개월 만에 요양소를 뛰쳐나왔다. 김정호가 향했던 곳은 '꽃잎'. 그리곤 다시 돌아간 요양소에서, "자꾸 노래하면 폐결핵이 심해져 죽는다"는 의사의 경고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외려 노래를 부르지 않으면 내가 죽을 거 같다"고.
결국 85년 11월 29일, 김정호는 50여 곡을 남기고 세상을 등졌다. 투병 막바지에 녹음한 노래 '님'은 꼭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는 것 같아 더욱 애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