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이션 ‘돼지의 왕’(연상호 감독)은 충격적입니다. 관람 전엔 ‘어떻게 애니메이션이 청소년 관람 불가 등급을 받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는데, 그럴 만하더군요. 강한 학생들이 약한 학생들을 힘으로 짓밟으며 군림하는 어느 중학교에서 일어나는 일을 그려낸 이 잔혹한 애니에는 폭력과 ’고강도‘ 욕설이 난무합니다. 유혈 장면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표현의 수위(水位)만이 ‘19금’의 주된 이유는 아닌 듯합니다. 전편에 흐르는 ‘약육강식’ 한국 사회에 대한 절망감, 가진 자에 대한 과격한 분노의 토로 등이 관람 연령을 상향시키는 데 한 몫 한 것으로 보입니다.
시작부터가 쇼킹합니다. 한 여자가 가정집 식탁에 머리를 떨군 채 숨져 있습니다. 그녀를 살해한 남편 경민은, 잠시 후 심부름센터를 통해 알아낸 연락처로 중학교 동창생 종석을 15년 만에 찾아갑니다. 그리고 둘은 끔찍했던 중학교 시절을 회상합니다. 그 때 무슨 일이 있었으며 이 남자의 인생은 왜 이렇게 망가졌을까요. 왜 아내를 살해하고 느닷없이 옛 동창을 찾아가는 걸까요.
그들이 겪은 중학교 시절은 지옥 같았습니다. 힘있는 소수 학생들의 폭력과 횡포에 다수가 숨죽였습니다. 물론 가난한 종석이나, ‘울보’별명을 가진 경민은 모두 ‘피지배층’이었습니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으로부터 ‘말죽거리 잔혹사’같은 작품에서 낯익은 설정 같지만 ‘돼지의 왕’에서 펼쳐지는 대결 구도는 미묘한 차이가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 교실을 지배하는 세력들은 힘만 센 게 아닙니다. 그들은 부자이고 공부도 잘 합니다. 돈 있는 집 아이들만이 사교육 잘 받아 점수 잘 딴다는 이른바 ‘학력의 세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들의 주먹과 발길질에 가진 것도 힘도 없는 아이들이 끔찍하게 짓밟힙니다.
이런 부조리한 구도에 대해 이 애니는 첫머리에서 말합니다. “힘 있고 돈 있는 애들은 나중에 사회에 나가 사랑을 받을 개(犬)들이고, 힘 없는 애들은 살찌워져 잡아먹힐 돼지다. 돼지는 자기 살을 찌우는게 행복이라고 여기지만, 그 살찐 몸이 먹이가 되는 줄도 모른다.”
하지만 숨죽이며 당해만 오던 순하고 바보같은 ‘돼지’ 무리의 학생들이 어느날 꿈틀대기 시작합니다. 그들 사이에 철이라는 리더가 떠오릅니다. 거친 환경에서 들개처럼 자란 그는 강한 주먹으로 몇몇 ‘개’들을 제압합니다. 아버지의 자살을 겪고, 노래방 도우미로 일하는 어머니에 눈물 흘리며 세상에 대한 증오심을 키워온 소년입니다. 그는 경민과 종석이 같은 약자들에게 다가옵니다. 구심점을 자처하는 그는 ‘돼지의 왕’이 되어 갑니다.
그러나 이 학교 공동체 안의 폭력과 부조리가 해소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애니는 폭력을 휘두르는 쪽 보다는 당하고 사는 약자 집단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들은 폭력을 혐오하고 평화를 갈망했지만, 강자의 맞선 약자의 폭력이 문제를 풀어 주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알아가게 됩니다.
극빈층의 종석은 철이가 ‘악인’을 넘어 ‘괴물’로 더 강하게 싸워 주기 바라지만, 좀 더 여유있는 노래방 집 아들 경민은 철이의 폭력에 거부감을 느낍니다. 그들 사이엔 배신과 균열이 일어납니다. ‘돼지의 왕’ 철이는 결국 퇴학 조치로 학교 울타리를 떠나야 합니다. 하지만 대결이 모두 끝난 것은 아닙니다. 학교를 떠난 철이는 더 극단적인 생각을 하게 되고 극적인 결말로 향해 갑니다.
‘돼지의 왕’은 중학생들 이야기라고만 볼 수는 없습니다. ‘약자가 폭력적으로 억압당하는’ 세상을 차갑게 드러내려는 우화처럼 보입니다. 학창 시절 당하고만 살던 종석의 삶은 사회로 나와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습니다. 간도 쓸개도 빼준 채 생계를 위해 유력 인사의 자서전을 대필해 주는 지식노동자일 뿐입니다.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은 채로 이 애니는 끝납니다. “남은 것은 얼음처럼 차가운 아파트와 그 보다 더 차가운 육신이 뒹구는 세상”입니다.
세상의 모순을 직시하는 리얼리즘적 태도에서 ‘돼지의 왕’은 분명 어떤 실사영화에서도 보기 힘들었던 치열한 문제의식과 안목을 가진 작품입니다. 절망을 담은 듯 시종 어두운 어두운 화면과 칙칙한 색감이 뒤덮은 이 작품은 공허한 오락 필름과의 대척점에서 우리 삶의 가장 큰 문제를 진지하고도 차갑게 풀어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너무 뜨거운 의욕 탓일까요. 약점도 눈에 띕니다. 인물들의 어투에서 옷차림까지 오늘 한국의 현실적 풍경을 가감없이 재현하고 있으면서도, ‘악역’에 해당하는 캐릭터들의 연기는 너무 과장되어 있습니다. 종민이 대필한 자서전 원고를 못마땅해 하며 고함치는 출판 관계자는 태도는 거의 조폭에 근접해 있고, 노래방에서 손님방에 도우미로 들어가게 해 달라고 애걸하는 철이 엄마를 ‘늙었으니 꺼지라’고 내치는 사장의 가혹한 태도 역시 과장된 느낌이어서 최선의 묘사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철이의 입에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건 악이다” 처럼 중학생에게 어울리지 않는 대사가 나오는 까닭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중학생들이 살아있는 고양이를 칼로 난자하며 피투성이를 만드는 등 위악적이란 느낌들 정도로 과도하게 잔혹한 장면들은 거부함을 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심각한 주제를 애니메이션이 소화할수 있음을 보여준 ‘돼지의 왕’은 독립 영화와 같은 역할을 하는 ‘독립 애니메이션’의 성과를 보여주면서 한국 에니메이션의 새로운 땅을 밟았습니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가 이 작품에 아시아영화진흥기구상 등 3관왕의 영예를 안긴 것도 그 때문이 것입니다. 하지만 다수의 공감을 얻기에는 아쉬움이 남는 작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