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붓칠 자국 선명한 서울 정동길 은행나무 아래에서 권덕하(權德河)의 시집 '생강 발가락'(애지 출간)을 읽었다. 그리고 충동적으로 서울역에서 대전행 KTX에 올랐다. 시인이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51편의 시는 하나같이 쉽고, 맑고, 깊었다. 하지만 철저한 무명 시인. 지역 출판사에서 나온 첫 시집인데, 책 날개에는 대전에서 태어나 역시 지역 문예지 '작가마당'으로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고만 적혀 있었다.

우선 그의 짧은 시 두 편. '물속 바닥까지 볕이 든 날 있다/ 가던 물고기 멈추고 제 그림자 보는 날/ 하산 길 섬돌에 앉은 그대 등허리도/ 반쯤 물든 나뭇잎 같아/ 신발 끄는 소리에 볕 드는 날/ 물속 가지 휘어 놓고/ 나를 들여다보는/ 저 고요의 눈'('볕' 전문)

'저건 뿌리다/ 무른 진흙 딛고 참은 울음이다/ 너덜겅 걷다가/ 매운 다리품이 감췄다가/ 비어져 나온 생각,// 식구들 잘 보듬고 가만히 나가/ 어둑발 훔치며 좌판 펼치는/ 아내의 걸음새에/ 땅을 미는 힘으로 솟은 햇귀가/ 속 깊이 쟁여 준 가락이다'('생강 발가락' 전문)

'신발 끄는 소리에 볕드는 날'의 고요와 아내의 울퉁불퉁한 (생강) 발가락에서 새벽 어스름 첫 햇빛(햇귀)까지 발견하는 시인과 소주 한 잔을 마주하고 앉았다. 올해 쉰셋. 남대전 고등학교에서 22년째 교편을 잡고 있는 영어교사다. 섬진강 상류 임실에서 다닌 초등학교 시절부터 글을 좋아했고 충남대 재학시절 '화요문학' 출신의 문청(文靑)이었지만,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신춘문예에 응모해 본 적 없다. "구태여 누구의 추인과 검증이라는 절차가 필요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때는 어렸을 때라 문단에 대한 편협한 생각도 있었고요. 문학은 자신이 하는 거라고 믿었죠. 아, 30년 전 대학 시절, 학교 문학상에 응모해 본 적은 있습니다. 선배들이 술값이 필요하다고 해서요. 시 부문 상금이 8만원이었는데, 다른 학생과 공동 당선으로 4만원을 받았죠. 그날 정말 두둑이 먹었습니다."

시간과 속도 속으로 삶의 흔적들이 사라져버리는 시대. 권덕하의 이번 시집‘생강 발가락’은 그 흔적들을 다시 복원하려는 순정한 노력이다. 개인적으로는“결혼하면 꼭 시집을 안겨주겠다”고 아내에게 다짐했던 25년 전 프러포즈의 약속 이행이기도 하다.

대전역 근처의 한 중국집에서 짬뽕국물에 소주를 털어 넣으며, 그는 '늦깎이 시인'의 변을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80년대에 쏟아져 나온 참여시와의 불화, 현실에 복무하는 시를 쓰느니 차라리 현장으로 가는 것이 더 낫겠다는 판단, 이후 조셉 콘라드(1857~1924)의 소설과 바흐친(1895~1975)의 비평을 읽으며 석·박사 논문을 썼던 90년대의 10년, 그리고 잠깐 동안의 문학평론가 시절을 거쳐 다시 불타오른 시 창작에의 열정 등이다.

2008년 한 해 그는 아내와 '별거'했다. 더 늦기 전에 공부하고 싶다는 그녀를 베이징에 유학보냈고, 마침 대학에 들어간 아들 역시 학교 기숙사에 들어갔다. 일 년 동안 그는 온전히 시와 동거했다. 하지만 '서랍 속에 넣어두는 시'는 더 이상 원치 않았다. 그해 말 우연히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문인 지원 공고를 봤다. 활동한 지 10년이 안 된 시인들 중 미발표 시 15편을 제출하면 심사해서 창작 지원금 1200만원을 지원한다는 내용이었다. 보름밖에 남지 않은 마감이었지만, 시인은 12편을 새로 써서 우편으로 보냈다. 당선자 10여명 중 그의 이름은 맨 위에 적혀 있었고, 그를 제외한 다른 이름들은 대부분 기라성 같은 기성 시인의 그것이었다.

멀게는 백석, 가깝게는 김수영이 그와 시적 혈연관계다. 시간과 속도 속으로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리는 시대. 권덕하의 시편들은 그 속도와 시간에 저항하며 실존적 흔적(痕跡)을 남기려는 순정한 노력들이다.

'오늘은 소 잡는 날/ 현수막 붉은 너털웃음에 파묻히는/ 깜깜한 속살/ 달빛 좋은 데로 두 근만 주시오/ 에이 여보, 달빛 치고 좋지 않은 데가 어디 있수/ 초승달에 오금 저리며/ 제 몸에서 기름덩이와 뼈 찬찬히 발라내는 밤'(정육 전문)

정육(精肉)은 지방이나 뼈 따위를 발라낸 살코기를 부르는 명사. 권덕하의 순정한 칼은 지적 허영과 관념의 기름 덩어리를 발라내고, 서정시와 전위시라는 재미없는 이분법을 넘어, 우리의 생명 근원에 자리한 삶의 비의들을 한 편씩 길어올린다. 지역에서 스스로를 단련시킨 이 시인의 야금술(冶金術)이 경이롭고 반가울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