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은 소, 와인, 바다가 모두 빨갛다
기 도이처 지음|윤영삼 옮김
21세기북스|372쪽|1만6000원
'일리아스' '오디세이'의 작가 호메로스는 색맹이었다? 1858년 영국의 정치가이자 호메로스의 광팬이었던 글래드스턴은 이렇게 주장한다. 호메로스의 모든 작품을 싹 훑어도 바다와 소를 '와인처럼 보인다'고 하고, '파랑'을 가리키는 단어는 아예 없다는 것이었다. 즉, '총천연색' 자연을 '흑백'처럼 보는 것 아니냐는 주장이었다.
영국 언어학자인 저자는 글래드스턴의 이런 주장에서 시작해 언어와 문화의 상관관계 전반을 훑으며 매력적인 책을 만들어냈다. 우선 색깔. 결론부터 말하면 호메로스뿐 아니라 당대의 그리스 사람들은 색맹이 아니라 색깔에 대한 인식이 단순했을 가능성이 크다. 인류학 연구 성과에 따르면 근대의 토착민들 역시 다양한 색깔의 실을 보여주고 같은 색을 고르라고 하면 다 골라낸다. 토착민들 역시 흑백이 먼저고 그다음 빨강, 노랑, 초록의 순서로 색깔을 구분하기 시작한다. 다만 색깔의 이름이 없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전후좌우 등 방향을 가리키는 말, 시제, 단어의 남성형·여성형에 이르기까지 모든 언어는 각각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미개한 문명이라고 해서 언어와 생각도 단순(미개)한 것이 아니며, 모국어에 따라 사람들의 사고방식도 달라진다는 점을 다양한 예를 통해 보여주는 지적인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