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아이' '너' 등을 부른 이종용을 처음 본 건 서울 명동 YWCA에서였다. 거기서 '청개구리' 노래모임이 열렸다. 이종용은 임용재와 함께 '에코스'로 활동 중이었다. 에코스가 당시 불렀던 노래가 '사랑해'란 노래다. 이 노래는 1971년 한민과 은희의 혼성듀엣 '라나에로스포'가 다시 불러 크게 히트를 쳤다.
그가 노래 부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무엇보다 부를 수 있는 음역대가 넓었다. 여자 소프라노가 내는 소리까지 자연스럽게 냈다. 강약을 잘 조절할 줄 알았고 노래에 힘이 있었다. 지금까지도 노래를 열심히 부르는 사람 두 명을 꼽으라면 송창식과 함께 이종용을 꼽는다.
이종용은 청개구리가 처음 생길 때부터 그 자리에 있었다. 기독교인인 그는 서울 명동 YWCA에서 '와이 틴 싱얼롱(Y-TEEN singalong: 함께 노래 부르는 모임)'을 지도했다. 그때 YWCA 총무가 한완상 전 교육부총리의 부인 김형씨였다. 이종용은 김형씨와 거의 남매 같은 사이로 지냈다.
어느 날 김형씨가 "청년문화가 없으니 노래모임을 하나 만드는 게 어떻겠느냐"는 아이디어를 냈다. 그녀는 이백천씨와 함께 기획해 청개구리를 만들었다. '연극의 밤' '시의 밤' '노래의 밤' 등 세시봉처럼 여러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나와 송창식이 통행금지 시간이 지나면 세시봉에서 잠을 자듯, 이종용은 YWCA 강당에서 잠을 잤다. 그는 종종 김민기 집에서 잠을 자기도 했다.
청개구리에서 처음 그를 만나곤 한동안 만나지 못했다. 그리고 2년쯤 지나 우연히 다시 만났다. 경남 마산시 재경학우회 초청으로 김세환, 어니언스와 함께 마산으로 공연 갔을 때였다. 우리 공연에 앞서 한 군복을 입은 젊은이가 관객들과 함께 싱얼롱을 하고 있었다. '별난 군인도 다 있구나'라고만 생각했다. 우리가 무대에 섰을 때 그가 경례했다. 그때서야 비로소 그를 알아봤다. 이종용이었다.
"어쩐 일이냐"고 물었다. 그에게 군 시절 이야기를 들었다. 입대를 했어도 노래는 놓지 않은 그였다. 경남 창원시에 있는 군종참모부 교회에서 군종 사병으로 근무하고 있다고 했다. 수요일과 일요일엔 훈련병을 인솔해 교회에 데려왔고 찬양시간에는 직접 반주를 했다. 주중엔 마산 제일여고에 대민 봉사로 파견 가 음악을 가르쳤다. 마산 문화방송국 합창단을 만들어 지휘도 맡고 있다고 했다.
그 자리에서 물었다. "노래를 계속하고 싶어?"
"네." 지체 없이 그가 답했다. "그럼 제대하고 날 찾아와라."
1973년 당시 나는 서울 명동에서 '엠 클럽'이란 카페 운영을 책임지고 있었다. 어니언스와 내가 주로 무대에 섰고 마지막 무대에서는 함께 노래를 불렀다. 마산에서 이종용을 만난 지 석 달도 채 안 돼 그가 카페에 찾아왔다. 옷차림이 허름했다. 아무래도 그대론 무대에 세울 수 없겠다 싶었다. 내 옷을 입혔다. 그럭저럭 맞았다. 무대에 올라 이종용은 '내 모든 게 떠나가네(There goes my everything)'를 불렀다. 그 뒤로 고정출연을 하게 되면서 이종용의 이름이 점차 알려졌다. '엠 클럽'뿐 아니라 '짝짜꿍' '오라오라' 등 통기타업소에도 출연했다.
이종용은 그때에도 봉사활동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입대 전 했던 YWCA 싱얼롱 지도도 다시 시작했다. YWCA 강당을 빌려 매년 '구두닦이들과 신문팔이 소년을 위한 자선 음악회'도 주관했다. 그때마다 그의 요청으로 나를 비롯, 통기타 가수들이 무보수로 노래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