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 조선일보 강제폐간 당시 만해는 본지에 '삼국지'를 연재하고 있던 중이었다. 폐간호에 실린 그의 마지막 '삼국지'의 내용은 주유가 형주(荊州) 진출을 꾀하면서 장수들에게 전투를 독려하는 대목이다. "그대들이 싸우지 아니하면 어찌할 작정이뇨. (중략) 어찌하여 나 한 사람을 위하여 국가의 큰일을 폐하리오."
시인이며 불교사상가였던 만해가 소설가로 데뷔한 것도 조선일보를 통해서였다. 1935년 4월 9일부터 1936년 2월 1일까지 총 241회에 걸쳐 '흑풍'을 연재한 것. 조선일보는 1935년 4월 2일자에서 '흑풍' 연재를 예고하며 "님의 침묵이란 시집으로써 이미 시인으로서의 선생을 대하였거니와 금번 이 흑풍으로써 다시 소설가로서의 선생을 대하게 됩니다"라며 "선생의 소설은 다른 소설과 유(類)가 다릅니다. 좀 더 다른 의미로 읽어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적었다. '좀 더 다른 의미'란 한용운 소설 속에서 독자들이 '민족의식'을 찾아줄 것을 주문하는 표현이었다. 이 소설이 연재되면서 조선일보 발행부수는 당시로는 놀라운 숫자인 6000부나 늘어나기도 했다. 그의 또 다른 대표작인 '박명' 역시 본지 1938년 5월 18일부터 1939년 3월 12일까지 총 223회에 걸쳐 연재됐다.
만해는 1935년 7월 현재의 코리아나호텔 자리에 조선일보 사옥이 지어졌을 때도 축사를 통해 "조선 사람의 문화 정도가 진보된 상징"이라며 기뻐했다. 만해는 조선일보에 '심우장 산시'와 '심우장 만필(漫筆)'을 연재하기도 했다.
1927년 신간회 경성지회장이었던 만해는 신간회 중앙위원이자 평양지회장인 고당 조만식(曺晩植)의 소개로 훗날 조선일보를 중흥시킨 계초 방응모(方應謨)를 만난 것으로 전해진다. 계초는 특히 만해와 벽초 홍명희를 존경하고 좋아해서, 세 사람은 새해가 되면 온천여행을 다닐 정도로 교분이 두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