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브 잡스의 자서전 '스티브 잡스'(월터 아이작슨 지음)가 24일 각국에서 동시 출간됐다.
“죽은 후에도 나의 무언가는 살아남는다고 생각하고 싶군요. 그렇게 많은 경험을 쌓았는데, 어쩌면 약간의 지혜까지 쌓았는데 그 모든 게 그냥 없어진다고 생각하면 기분이 묘해집니다. 그래서 뭔가는 살아남는다고, 어쩌면 나의 의식은 영속하는 거라고 믿고 싶은 겁니다.”
책의 말미에서 잡스는 이렇게 밝히고 있다. 어쩌면 평생을 신비주의로 일관하던 그가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유일한 공식 전기 ‘스티브 잡스’를 써 달라고 요청한 것은 평생 살아오면서 쌓은 “약간의 지혜”를 세상에 남기고 싶어서일 것이다. 그 약간의 지혜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내 열정의 대상은 사람들이 동기에 충만해 위대한 제품을 만드는 영속적인 회사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그 밖의 다른 것은 모두 2순위였다. 물론 이윤을 내는 것도 좋았다. 그래야 위대한 제품을 만들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윤이 아니라 제품이 최고의 동기 부여였다.” 요컨대 “위대한 제품을 만드는 영속적인 회사를 구축”하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것이다. 이 책에 담긴 것은 잡스가 만들어 온 위대한 제품에 대한 이야기인 동시에 그 제품을 만들었던 위대한 조직에 대한 이야기이며, 그 조직을 이끌었던 위대한 인간에 대한 이야기이다.
책에는 21세기를 새롭게 그려 나간 창조자 스티브 잡스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 부모 집의 조그마한 차고에서부터 시작해 세계 최고의 회사가 된 애플의 놀라운 성장 비밀, 애플I에서 시작해 매킨토시와 토이 스토리를 거쳐 아이폰과 아이패드에 이르는 혁신적 제품들의 탄생 비화, 그리고 애플의 CEO 사임 이후 두 달여에 걸친 그 마지막 순간까지 처음 공개되는 온갖 이야기들과 함께 그를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전설의 프레젠테이션 준비 과정에서 극도의 절제와 완벽주의로 상징되는 경영 비법까지, 이 책은 시대의 최종 멘토 잡스의 혜안이 빛나는 명언으로 가득 차 있다.
저자는 2009년부터 2년간 잡스와 함께 어린 시절 집을 방문하거나 함께 산책을 하며 그를 40여 차례 집중 인터뷰했고 그의 친구, 가족, 동료뿐만 아니라 그에게 반감을 가진 인물이나 라이벌까지 포함해 100여 명의 인물들을 만났다. 그중에는 잡스의 최대 라이벌이었던 빌 게이츠를 비롯해, 애플의 공동 창업자 스티브 워즈니악, 애플의 핵심 디자이너 조너선 아이브, 그리고 애플의 후계자 팀 쿡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IT의 영웅들이 모두 포함돼 있다.
또한 이 책에는 실리콘밸리에서 보낸 잡스의 어린 시절부터 그의 마지막 순간까지, 아주 개인적인 일화부터 공식적으로 의미 있는 사건까지, 그의 괴팍한 채식주의 믿음과 선불교로부터 받은 영향, 디자인 스튜디오에서의 일, 픽사에서의 비전, 애플의 혁신 정신 등 잡스의 개인사 전체가 담겨 있다.
특히 20장과 40장에는 그동안 자세히 드러난 적 없는 그의 복잡한 가족사와 연애사들이 망라돼 있다. 생모와 친여동생을 만나게 된 일화, 나중에 인정한 딸 리사와의 오르락내리락하던 관계, 그가 만난 여인들, 그리고 죽기 전까지 만나지 않았던 아버지와 사실은 마주친 적이 있다는 사실 등 그의 개인적인 이야기가 소개돼 있다. 잡스는 이 전기에 실을 사진을 아이작슨과 함께 고르기도 했다. 그가 직접 고른 1장에 실린,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찍은 사진은 최초로 공개되는 것이다. 그리고 40장과 41장에는 그의 마지막 순간에 대한 기록이 들어 있다.
비밀주의를 고수하던 스티브 잡스가 작가 아이작슨에게 이 책을 쓰게 한 또 다른 이유는 아이들 때문이다. 죽기 며칠 전 아이작슨과의 마지막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밝혔다. “우리 아이들이 나에 대해 알았으면 했어요. 아이들이 나를 필요로 할 때 항상 곁에 있어 주진 못했지요. 그래서 아이들이 그 이유를 알기를, 내가 무엇을 했는지 이해하기를 바랐습니다.”
6개 산업 부문에서 놀라운 혁명을 일으킨 창조적 기업가이자 기술과의 소통 방식을 바꾼 미디어 혁명가, 기술의 대중 친화력을 중시한 기술의 미니멀리스트이자 기술과 인문학을 결합시킨 디지털 철학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끝없는 열정에 미친 남자였던 잡스가 사랑하고 꿈꾸고 열망한 모든 것, 그동안 숨어 있던 모든 이야기가 그 자신의 목소리를 통해 공개됐다.
◇저자 아이작슨은 스티브 잡스의 삶에서 무엇을 주목하려고 했나?
전 세계의 공동체들이 디지털 시대에 걸맞은 창의적 경제를 구축하려고 애쓰는 이 시대에, 스티브 잡스야말로 독창성과 상상력, 지속 가능한 혁신의 궁극적 아이콘으로 우뚝 설 수 있는 인물이다. 그는 21세기에 가치를 창출하는 최선의 방법은 기술과 창의성을 연결하는 것임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엔지니어링의 놀라운 재주에 상상력의 도약이 결합되는 회사를 세웠다.
◇스티브 잡스가 평생 바랐던 것은 무엇인가?
잡스는 두 가지 유산을 남기고 싶어 했다. 혁신과 변혁을 선도하는 위대한 제품을 만드는 것, 그리고 영구히 지속될 수 있는 회사를 구축하는 것, 이렇게 두 가지였다. 그는 에드윈 랜드와 빌 휼렛, 데이비드 패커드 등과 같은 인물의 반열에 오르고자 했다.
잡스는 말했다. “나의 목표에는 언제나 위대한 제품을 만드는 것뿐 아니라 위대한 회사를 세우는 것까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스티브 잡스는 어떻게 인문학과 과학기술의 교차라는 꿈을 꾸게 되었나?
“어릴 때부터 항상 저 자신이 인문학적 성향을 지녔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전자공학도 무척 맘에 들었거든요. 그러던 어느 날 저의 영웅 중 한 명인 폴라로이드사의 에드윈 랜드가 한 말을 읽었어요. 인문학과 과학기술의 교차점에 설 수 있는 사람들의 중요성에 관한 얘기였는데, 그걸 읽자마자 저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 결심했지요.”
마지막 슬라이드에서 잡스는 아이패드가 구현하는 그의 인생 테마 한 가지를 다시 한 번 강조했다. ‘과학기술’ 거리와 ‘인문학’ 거리의 교차로를 알리는 표지판이었다. “애플이 아이패드 같은 제품들을 만들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늘 과학기술과 인문학의 교차점에 서려고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렇게 결론지었다. 아이패드는 창의성이 생활 도구들과 만나는 곳, 즉 ‘더 홀 어스 카탈로그’를 디지털로 구현한 것이었다.
“폴라로이드의 에드윈 랜드는 인문학과 과학기술의 교차점에 대해 얘기했다. 나는 그 교차점을 좋아한다. 거기에는 마법적인 무언가가 존재한다. 혁신을 꾀하는 사람은 수없이 많다. 따라서 그것이 내 경력의 주요한 차별성은 아니다. 애플이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는 이유는 우리의 혁신에 깊은 인간애가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훌륭한 예술가들과 훌륭한 엔지니어들이 비슷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양쪽 모두 자기를 표현하려는 욕망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실제로 원조 맥 개발에 참여한 최고의 사람들 가운데는 시인이나 음악가로 활동해도 먹고살 수 있는 사람들이 상당수 있었다. 1970년대에 컴퓨터는 자신의 창의성을 표현하는 하나의 수단이 되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미켈란젤로 같은 위대한 예술가들은 과학에도 능통했다. 미켈란젤로의 경우, 조각하는 법뿐 아니라 채석 방법에 대해서도 잘 알았다.”
◇스티브 잡스는 자신의 친부모와 양부모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가?
“제가 버려졌기 때문에 죽어라 열심히 일해 부모님이 나를 되찾고 싶게 만들려 한다는 식의 어처구니없는 얘기들이 나도는데, 정말 말도 안 되는 얘기들입니다. 입양됐다는 사실을 안 것이 제게 독립성을 키워 주었을지는 모르지만 버림받았다는 느낌에 빠진 적은 없었어요. 저는 항상 저 자신이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지요. 부모님이 그렇게 느끼도록 해 주셨어요.” 누군가가 폴 잡스와 클라라 잡스를 그의 ‘양부모’라고 부르거나 ‘진짜’ 부모가 아니라는 식으로 얘기하면 그는 신경을 곤두세우곤 했다. “그들은 1000퍼센트 제 부모님입니다.” 반면 생부모에 대해 얘기할 때는 퉁명스러웠다. “그들은 나의 정자와 난자 은행이지요. 무정한 게 아니라 사실이 그래요. 정자 은행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지요.”
잡스는 조앤 심프슨(잡스의 생모)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의 존재를 알렸고, 로스앤젤레스에서 그녀를 만나기로 했다. 훗날 그는 거의 호기심에서 비롯한 행동이었다고 주장했다. “저는 사람의 특성을 결정하는 데 유전보다는 환경이 더 많은 역할을 한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생물학적 뿌리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궁금해할 수밖에 없잖아요.” 그는 또한 조앤 심프슨에게 그녀가 한 일이 괜찮다고 안심시켜 주고 싶었다. “친어머니를 만나려고 했던 주된 이유는 잘 지내고 계신지 확인하고 감사 인사를 전하기 위해서였어요. 낙태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런 결정을 내리지 않은 일이 고맙게 여겨졌거든요. 그때 그분은 스물세 살이었으니 저를 끝까지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겠어요.”
잔달리(잡스의 생부)가 자신이 과거에 운영했던 레스토랑들에 대해 설명할 때 그보다 더 놀라운 사실이 드러났다. 그는 지금 그들이 앉아 있는 곳보다 더 고급스러운 레스토랑도 경영한 적이 있다면서, 새너제이 북쪽에서 지중해라는 레스토랑을 운영할 때 그녀가 찾아왔으면 좋았을 거라고 다소 감상에 젖은 듯말했다. “정말 멋진 곳이었어. 기술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들은 다 왔지. 스티브 잡스도 말이야.” 모나(잡스의 여동생)는 놀라서 눈이 동그래졌다. “정말이야. 그가 종종 찾아왔어. 상냥한 데다가 팁도 많이 주곤 했지.” 그가 덧붙였다. 심프슨은 “스티브 잡스가 당신 아들이에요!”라고 말하고 싶은 걸 겨우 억눌렀다.
그녀가 새너제이 인근의 레스토랑 얘기를 꺼냈을 때 잡스 역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곳에 갔던 기억이 났고, 자신의 생부를 만났던 장면도 떠올랐다. “기가 막히더군요. 그 레스토랑에 몇 번 갔고 주인도 만났거든요. 그래요, 시리아 사람이었어요. 악수까지 나눴는데….”
◇스티브 잡스는 왜 교회에 나가지 않게 되었는가?
가족이 ‘라이프’를 구독했는데, 1968년 7월 호 표지에 기아에 시달리는 두 비아프라(나이지리아의 동부 지방) 어린이의 충격적인 사진이 실렸다. 잡스는 그것을 주일학교에 들고 가 목사님을 만났다. “만약 제가 손가락을 하나 들어 올린다면, 하나님은 그 전부터 이미 제가 어느 손가락을 들어 올릴지 아시나요?”
그러자 목사님이 대답했다. “그렇단다. 하나님은 모든 걸 다 아신단다.”
잡스는 ‘라이프’의 표지를 내보이며 물었다. “그럼 하나님은 이것에 대해서도 아시고 이 아이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아시겠네요.”
“스티브, 이해하기 어렵다는 건 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것도 알고 계신단다.”
잡스는 그러한 하나님을 숭배하는 일과는 어떠한 관련도 맺기 싫다고 선언했고, 다시는 교회에 나가지 않았다.
◇스티브 잡스는 선불교에서 어떤 영향을 받았는가?
“인도에서 7개월을 보내고 돌아온 후 저는 서구 사회의 광기와 이성적 사고가 지닌 한계를 목격했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내면을 들여다보면 우리는 마음이 불안하고 산란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것을 잠재우려 애쓰면 더욱더 산란해질 뿐이죠.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마음속 불안의 파도는 점차 잦아들고, 그러면 보다 미묘한 무언가를 감지할 수 있는 여백이 생겨납니다. 바로 이때 우리의 직관이 깨어나기 시작하고 세상을 좀 더 명료하게 바라보며 현재에 보다 충실하게 됩니다. 마음에 평온이 찾아오고 현재의 순간이 한없이 확장되는 게 느껴집니다. 또 전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보는 밝은 눈이 생겨납니다. 이것이 바로 마음의 수양이며, 지속적으로 훈련해야 하는 것입니다. 인도에서 돌아온 이후 선불교는 제 삶에 깊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워즈 같은 디지털광들은 아날로그적이고 일상적인 무언가에 관심을 거의 기울이지 않았지만 잡스는 그것이 핵심 요소라고 생각했다. 특히 잡스는 팬이 필요 없는 전원 공급 장치를 원했다. 그가 생각하기에 컴퓨터 내부의 팬이 내는 소음은 선불교의 정신과 어긋나는 것이었다. 정신 집중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스티브 잡스는 왜 야채와 과일만 먹는 극단적 채식에 빠져들고 이를 평생 유지했는가?
프랜시스 무어 라페의 ‘작은 지구를 위한 식습관’이었다. 채식주의가 주는 개인적인 그리고 지구적인 혜택을 극찬하는 내용이었다. “그 책을 읽고 육식을 영원히 멀리하기로 결심했지요.” 잡스의 회상이다. 그러나 그 책은 그에게 장 청소를 통한 정화나 단식, 혹은 한 가지나 두 가지 음식만 먹는 방식 등 극단적인 식생활을 수용하도록 부추겼다. 그리하여 그는 오로지 당근이나 사과만 먹으며 몇 주를 버텨 나가기도 했다.
잡스의 식습관은 20세기 독일 출신의 영양학 전문가 아르놀트 에렛이 쓴 ‘디톡스 식습관의 치유 체계’를 읽으면서 더욱 기묘한 집착으로 변해 갔다. 그는 전분이 없는 야채와 과일만 먹으면 몸에 해로운 점액이 형성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믿었으며, 아울러 장기 단식을 정기적으로 단행함으로써 몸을 깨끗이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는 곧 시리얼조차 끊는다는 것을 의미했으니, 밥이나 빵, 곡물, 우유 등은 말할 것도 없었다. 잡스는 친구들에게 그들이 먹는 베이글에 숨어 있는 독소의 위험성을 경고하기 시작했다. “저 특유의 기묘한 방식으로 식생활을 이어 나갔지요.” (중략) “단식에 들어가서 일주일이 지나면 정말 황홀한 기분을 느낄 수 있어요.” 잡스의 말이다. “소화시킬 게 아무것도 없는 데서 비롯되는 엄청난 활력을 얻을 수 있단 얘깁니다. 몸 상태도 안팎으로 최상에 이르지요. 당시 저는 어느 때건 벌떡 일어나 샌프란시스코까지 걸어갈 수도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어요.”
잡스는 과일 위주의 채식주의 식습관이 해로운 점액뿐 아니라 체취도 막아 준다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체취 제거제를 쓸 필요도, 정기적으로 샤워를 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잡스는 왜 리드 대학에 들어갔으며 한 학기만에 자퇴했는가?
“스탠퍼드에 들어가는 애들은 이미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알았어요. 예술적 사고와는 담쌓은 애들이었지요. 저는 더 예술적이며 흥미로운 무언가를 접하고 싶었거든요.” 그 대신에 그는 오로지 한 가지 선택안만을 고집했다. 오리건 주 포틀랜드에 있는 LAC(학부 중심으로 순수 학문에 중점을 두는 소규모 대학교)인 리드 대학교에 가겠다는 것이었다.
잡스는 별다른 가치도 없어 보이는 교육에 부모님의 돈을 그렇게나 많이 쓰는 것에 죄의식을 느끼기 시작했다고 훗날 밝혔다. “노동자 계층에 속하는 부모님이 평생 모은 돈 전부가 저의 대학 학비로 소진되고 있었어요.” 세간의 관심을 끈 스탠퍼드 대학교 졸업식 연설에서 잡스는 이렇게 말했다. “앞으로 무엇을 하며 살고 싶은지도 몰랐고, 대학이 그걸 알도록 도와줄 것 같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부모님이 평생에 걸쳐 저축한 돈만 축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퇴하기로, 그래도 모든 일이 잘 풀릴 것으로 믿기로 결심했습니다.”
◇반문화와 LSD 체험은 스티브 잡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잡스는 동갑내기 친구는 별로 없었지만, 1960년대 후반의 반문화 운동에 빠져 있던 12학년 학생들 몇 명을 알게 되었다. 그때는 컴퓨터광의 세계와 히피의 세계가 겹치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그 고학년 친구들은 엄청 똑똑한 아이들이었어요. 우리는 수학과 과학, 전자공학에 대한 흥미를 공유했고, LSD(환각제의 한 종류)와 반문화 운동 전반에도 관심을 기울였지요.”
“신비의 시대에 성년이 된 셈이지요.” 잡스의 회상이다. “우리의 의식은 선과 LSD에 의해 고양되었습니다.” 그는 나이가 들어서까지도 환각제가 자신을 깨어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다고 평가한다. “LSD는 심오한 경험이었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경험 중 하나였지요. LSD는 사물에 이면이 있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약 기운이 떨어지면 무엇을 보았는지 기억할 수 없었지만 뭔가를 보았다는 사실만큼은 알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 중요한지에 대한 제 인식을 강화해 주었습니다. 돈을 버는 것보다 멋진 무언가를 창출하는 것,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모든 것을 역사의 흐름과 인간 의식의 흐름 속에 되돌려 놓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잡스는 이 카탈로그(더 홀 어스 카탈로그)의 열렬한 팬이 되었다. 특히 고등학생이던 1971년에 나온 최종판에 크게 매료되었는데, 그는 대학 생활을 할 때와 올 원 팜에서 지낼 때도 이 카탈로그를 곁에 두었다. “최종판 뒤표지에는 이른 아침의 시골길 사진이 실려 있었어요. 모험심 가득한 사람이 히치하이킹을 하고 있을 법한 그런 길요. 그리고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늘 갈망하고 우직하게 나아가라.(Stay Hungry, Stay Foolish.)’” 브랜드는 잡스가 이 카탈로그에 담긴 정신에 부합하는 문화적 융합을 가장 잘 구현한 인물이라고 말한다. “스티브는 반문화와 기술의 교차점 한가운데 있습니다. 그는 인간에게 유용한 도구가 어떤 것인지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요.”
◇스티브 잡스는 괴짜에 거짓말쟁이였는가?
그는 눈을 깜박이지 않고 상대를 응시하는 법을 갈고닦았으며 길게 침묵을 유지하다가 갑자기 날카롭고 빠르게 말을 쏟아 내는 법을 완성했다. 강렬함과 냉담함이 기이하게 조합된 데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머리에 듬성듬성 기른 수염까지 더해져 그는 광기에 싸인 주술사 분위기를 풍겼다. 잡스는 이렇게 카리스마 넘치는 면모와 기이한 행태 사이를 계속 왔다 갔다 했다. “그는 발을 질질 끌며 돌아다녔고 반은 미친 듯 보였어요.”
잡스가 어느 순간 시속 160킬로미터 이상으로 달렸다고 한다. 결국 경찰이 나타나 그를 제지하고는 속도위반 딱지를 떼기 시작했다. 몇 분이 지났는데도 경찰관이 여전히 끄적거리고 있자, 잡스가 경적을 울렸다. “무슨 일이시죠?” 경찰관이 물었다. “나 바쁘다고요.” 그가 답했다. 신기하게도 경찰관은 화를 내지 않았다. 그저 딱지 떼기를 마무리하고는 시속 90킬로미터 이상으로 달리다가 또 적발되면 그때는 감옥에 가게 될 거라고 경고했다. 경찰관이 떠나자마자 잡스는 차를 출발시켜 다시 시속 160킬로미터까지 밟았다. “그는 일반적인 규칙들이 자신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믿는 게 틀림없었어요.” 로스만이 놀라워하며 말했다.
‘현실 왜곡장’이라는 말은 어느 정도는 잡스가 거짓말을 하는 성향이 있다는 사실을 수사적으로 그럴듯하게 표현한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거짓말보다 훨씬 더 복잡한 유형의 조작 행위를 가리켰다. 세계 역사와 관련된 특정 사실이든, 회의에서 아이디어를 낸 사람이 누구였는지에 대한 기억이든, 그는 진실은 고려하지 않은 채 단언하듯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정당하다고 느낄 경우 종종 사람들을 오도하거나 진실을 숨기는 것이 잡스 성격의 일부였다. 반면 그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포장하거나 감춰 두는 사실을 말함으로써 잔인할 정도로 솔직해지는 때도 있었다. 의도적인 거짓말과 지나친 솔직함 모두 일반적인 규칙들이 자신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그의 니체 철학적 태도의 여러 측면일 뿐이었다.
넥스트에서의 경험 덕분에 잡스는 성숙해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성격이 아주 원만해진 것은 아니었다. 그의 메르세데스 자가용에는 여전히 번호판이 없었고, 회사 정문 옆의 장애인 주차 구역에 차를 세웠으며, 가끔은 두 칸에 걸쳐 주차할 때도 있었다. 이는 일종의 러닝 개그(영화나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코믹한 요소를 계속 되풀이하는 것)가 되었다. 직원들은 “다른 곳에 주차하라.(Park Different.)”라고 적힌 표지판을 만드는가 하면, 장애인 주차 구역의 휠체어 기호를 메르세데스 로고로 다시 그리기도 했다.
◇스티브 잡스의 좌우명은?
또 하나의 차트에는 선문답 비슷한 어구가 적혔는데, 잡스는 내게 그것이 가장 좋아하는 금언이라고 말했다. “여정 자체가 보상이다.” 그는 맥 팀이 고귀한 임무를 맡은 특별 부대라고 강조하기를 좋아했다. 언젠가 모두 함께 보낸 시간을 돌아보며, 고통스러웠던 순간은 잊어버리거나 웃어넘길 것이고 그때를 황홀했던 절정기로 여기게 될 것이라는 의미였다.
◇스티브 잡스는 돈과 소유물에 대해 어떤 생각을 품었는가?
“애플의 많은 사람들은 웬만큼 돈을 만지기 시작하자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고급 롤스로이스 자동차를 몰기 시작하고 집도 여러 채 장만하더군요. 각각의 집에 지배인도 두고, 나중에는 그 지배인을 관리할 또 다른 누군가를 고용하고요. 그들의 아내는 성형수술을 자꾸 해서 기괴한 모습으로 변해 갔습니다. 나는 그런 삶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건 정신 나간 짓이에요. 나는 돈이 내 인생을 망치게 만드는 일은 없을 거라고 다짐했습니다.”
물질적인 소유물에 대한, 특히 디자인이 뛰어나고 섬세하게 만들어진 물건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다. 예를 들면 포르쉐와 메르세데스 자동차, 헨켈 칼과 브라운 가전제품, BMW 오토바이, 언셀 애덤스의 사진들, 뵈젠도르퍼 피아노, 뱅앤올룹슨의 오디오기기 같은 것들이었다. 그럼에도 자신이 사는 집은 부자가 된 이후에도 결코 화려하게 꾸미지 않았으며, 가구도 거의 없이 단출해서 셰이커교도(기독교의 한 종파로, 금욕적이고 단순한 생활양식을 추구했으며 장식을 배제하고 본래 의도에 충실한 소박한 가구를 즐겨 썼다)도 저리 가라 할 정도였다. 그는 수행원이나 개인 경호원도 두지 않았다. 근사한 차를 소유했지만 항상 직접 운전해서 몰고 다녔다.
불교에 몰입하던 시절 잡스가 배운 교훈은 물질적 소유가 삶을 더욱 풍성하게 하기보다는 방해한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아는 웬만한 CEO들은 보안과 안전에 아주 세세하게 신경을 쓰지요.” 그가 말한다. “심지어는 집에도 경호원을 두더군요. 그게 어디 사람 사는 겁니까? 미친 짓이지요. 우리는 그런 방식으로 아이들을 키우고 싶지 않다, 그렇게 결정을 내린 겁니다.”
잡스는 최소한의 필수품을 제외하고는 우드사이드 저택에 가구를 들이지 않았다. 침실에는 옷장과 매트리스, 식당으로 쓰는 공간에는 카드놀이용 테이블과 몇 개의 접이의자가 전부였다. 그는 주변에 자신이 감탄할 수 있는 것들만 놓기를 원했고, 그래서 그저 나가서 많은 가구를 사들이는 일 자체가 힘에 겨웠다. 하지만 이제 아내와, 그리고 곧 태어날 아이와 함께 평범한 동네에 살게 된 그는 양보를 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쉽지는 않았다. 그들은 침대와 옷장, 그리고 거실에 놓을 스테레오 시스템을 구입했지만, 소파와 같은 가구들을 사들이는 데는 훨씬 더 긴 시간이 걸렸다. “우리는 사실상 8년 동안 가구를 구입하는 문제에 대해 토론을 한 셈이에요.” 파월이 회상했다. “우리는 반복해서 우리 자신에게 물었죠. 소파의 목적은 과연 무엇인가?” 가전제품을 사는 것도 단순한 충동구매가 아니라 하나의 철학적인 과업이었다.
집이 너무도 검소해서, 빌 게이츠는 아내와 함께 방문했을 때 조금 당황하기까지 했다. “가족 모두가 여기서 사는 거예요?” 게이츠가 물었다. 그는 시애틀 인근에 6000제곱미터의 저택을 짓는 중이었다. 잡스는 애플에 복귀한 이후에도 집에 안전 요원이나 상주 관리인 들을 두지 않았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갑부로서는 드문 경우였다. 낮에는 뒷문을 열어 놓기까지 했다.
◇왜 스티브 잡스는 검은색 터틀넥만 입었는가?
잡스는 자신이 입을 유니폼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일상적으로 편리할 뿐 아니라(이것이 그가 주장한 이유였다.) 특징적 스타일을 표현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저는 이세이에게 제가 맘에 들어 하던 그의 검은색 터틀넥을 몇 벌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어요. 그랬더니 그 옷을 100벌 정도 만들어 주더군요.” 이 얘기를 듣고 내가 놀라는 걸 본 잡스는 옷장에 쌓여 있는 검은색 터틀넥을 보여 주었다. “이게 제가 입는 옷입니다. 죽을 때까지 입어도 될 만큼 있지요.”
◇잡스는 암 선고 이후 왜 수술을 거부했는가?
잡스의 친구들과 아내는 종양 제거 수술을 받지 않겠다는 잡스의 결정에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술은 당시 널리 인정받던 유일한 치료 방법이었다. “그들이 내 몸을 여는 게 싫었어요. 그래서 다른 방법들이 효과가 있는지 알아보려 했지요.” 훗날 그는 회한이 담긴 어조로 내게 말했다. 구체적으로 그는 주로 신선한 당근과 과일 주스로 구성된 엄격한 채식 위주의 식단을 고수했다. 여기에 침술과 다양한 약초 요법을 병행했고 가끔 인터넷이나 전국 각지 사람들과의 상담을 통해 알아낸 민간요법을 몇 가지 사용하기도 했다. 심령술도 거기에 속했다. 한동안은 캘리포니아 남부에서 자연치료 클리닉을 운영하며 유기농 약초 복용과 주스 단식요법, 빈번한 장세척, 물요법, 모든 부정적인 감정 표출 등을 강조하는 의사에게 치료를 맡기기도 했다.
◇투병 생활 중에도 여전히 디자인에 집착하는 잡스
잡스는 때때로 광분하는 경우가 있었다. 자신이 통제권을 휘두를 수 없다는 사실에 약 올라 했고, 가끔은 환각을 일으키거나 화를 냈다. 거의 의식이 없을 때에도 그의 강한 성격이 그대로 표출되었다. 한번은 잡스가 매우 안정적인 상태일 때 폐 전문의가 그의 얼굴에 마스크를 씌우려 했다. 그러나 잡스는 그것을 벗겨 내고 디자인이 마음에 안 들어서 쓰기 싫다고 투덜거렸다. 말도 제대로 못하면서 마스크를 다섯 가지쯤 가져오라고, 그러면 자신이 마음에 드는 디자인을 고르겠다고 지시했다. 의사들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파월을 보았다. 결국 파월이 잡스의 주의를 돌리고 그 틈을 타서 의사들은 간신히 마스크를 씌웠다. 그는 또한 손가락에 끼운 산소 모니터도 못마땅해했다. 너무 볼품없고 복잡하다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그것을 좀 더 단순하게 디자인하는 방법을 제안했다. “그는 주변 사물과 환경의 미묘한 차이 하나하나에 아주 민감했고, 그런 것들이 그를 피곤하게 했어요.” 파월의 회상이다.
◇스티브 잡스는 어떻게 컴퓨터에 빠져들었는가?
어느 저녁, 그는 모임(HP 탐구자 클럽)이 끝난 후 HP의 레이저 엔지니어 한 명에게 부탁해 홀로그래피 실험실을 구경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 회사가 개발하고 있던 작은 컴퓨터들이었다. “거기서 나는 첫 데스크톱 컴퓨터를 봤어요. 9100A라고 불린 그것은 사실 계산기를 미화해 말하는 것이었지만 진정 최초의 데스크톱 컴퓨터이기도 했지요. 20킬로그램 정도 되는 거대한 몸집이었지만 정말 아름다웠어요. 첫눈에 반해 버렸지요.”
◇스티브 워즈니악과 언제 만나 어떻게 애플을 창업하게 되었나?
컴퓨터가 완성되자 페르난데스는 워즈에게 홈스테드 고등학교에 한번 만나 보면 좋을 학생이 있다고 말했다. “그 친구 이름도 스티브인데, 선배처럼 전자공학에 푹 빠져 있는 데다 장난치는 것도 무척 좋아하거든.” 휼렛이 패커드의 집에 들어간 지 32년 만에 실리콘밸리 역사에서 가장 의미심장한 차고 모임이 이뤄진 것이다. “스티브와 저는 만나자마자 빌의 집 앞 인도에 걸터앉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얘기를 나눴죠. 서로가 저지른 장난질이며 직접 모방하거나 고안한 전자공학 설계에 관한 얘기들 말이에요.” 워즈의 회상이다. “우린 공통점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대개 다른 사람들한테는 제가 진행하던 설계에 대해 설명하는 게 쉽지 않았는데, 스티브는 바로바로 알아듣더라고요. 그래서 아주 맘에 들었죠. 깡말랐지만 강단이 있고 활기가 넘치는 친구였어요.” 잡스 역시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때까지 제가 만난 사람 중에서 전자공학에 대해 저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워즈가 처음이었지요.” 잡스가 한번은 이렇게 말하며 자신의 전문 지식을 과장했다. “만나자마자 맘에 들었어요. 저는 또래보다 좀 더 성숙한 편이었고 워즈는 자기 또래보다 좀 덜 성숙한 편이었으니 서로 비슷한 수준이 된 거지요. 워즈는 정말 머리가 좋았지만 정서적으로는 저와 동갑이나 마찬가지였어요.”
워즈는 훗날 이렇게 회상했다. “키보드의 키를 몇 개 눌러 보았습니다. 그러곤 정말 깜짝 놀랐어요. 제가 누른 글자가 화면에 나타나지 뭡니까!” 1975년 6월 29일 일요일, PC 역사에 한 획이 그어지는 순간이었다. “역사상 처음으로 키보드의 글자를 쳐서 그것을 바로 눈앞에 있는 화면에 띄우는 일이 벌어진 겁니다.” 이 소식을 들은 잡스도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워즈에게 질문을 쏟아부었다. 컴퓨터가 네트워크로 연결될 수 있을까? 메모리 장치를 위한 디스크를 추가할 수 있을까? (중략) 잡스는 이렇게 제안했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가 직접 회로 기판을 만들 시간이 없다. 그러니 “인쇄 회로 기판(PCB)을 만들어서 판매하면 어떨까?” 두 사람은 그야말로 딱 맞는 파트너였다. “제가 뭔가 근사한 걸 고안하면 스티브는 그걸로 수익을 올릴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곤 했지요.” 워즈의 말이다. 그는 자신의 머리에서는 절대 그런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을 거라고 말한다. “돈을 받고 컴퓨터를 판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어요. ‘몇 개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팔아 보자.’라고 제안한 사람은 바로 스티브였지요.”
하루는 잡스가 사과나무 가지치기를 하러 올 원 팜(스티브 잡스가 속해 있던 히피 공동체)을 방문했다. 그날 돌아오는 길에 워즈가 공항으로 그를 마중 나왔다. 차를 타고 로스앨터스로 향하는 길에 두 사람은 여러 가지 이름을 생각해 보았다. 기술적인 느낌이 풍기는 매트릭스, 또는 이그제큐텍(Executek) 같은 신조어, 아니면 아예 평범한 이름인 퍼스널 컴퓨터스 등등 여러 의견이 나왔다. 잡스가 사업 등록 관련 서류를 제출하기로 한 다음 날까지는 회사 이름을 결정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마침내 잡스가 ‘애플 컴퓨터(Apple Computer)’라는 이름을 제안했다. “마침 그때 저는 과일만 먹는 식단을 지키고 있었어요. 사과 농장에서 돌아오는 길이었고요. ‘애플’은 재밌으면서도 생기가 느껴지고 또 위협적인 느낌이 없었지요. ‘애플’이란 말은 ‘컴퓨터’란 말의 강한 느낌을 누그러뜨려 주잖아요. 게다가 ‘애플’은 전화번호부에서 ‘아타리(Atari)’보다 먼저 나올 수 있고요.” 그는 다음 날 오후까지도 더 좋은 이름이 떠오르지 않으면 애플이란 이름으로 가겠다고 워즈에게 말했다. 그리고 결국 애플은 그들 회사의 이름이 되었다.
◇제품의 보이지 않는 곳까지 신경 쓰는 잡스 특유의 완벽주의가 탄생하게 된 계기는?
50년이 지난 지금, 그 울타리는 아직도 마운틴뷰 집의 뒤뜰과 옆 마당을 둘러싸고 있다. 나에게 그 울타리를 자랑하듯 보여 줄 때 잡스는 방책 패널을 쓰다듬으며 아버지가 마음속 깊이 심어 준 교훈 한 가지를 떠올렸다. 그의 아버지는 장롱이나 울타리 같은 것을 만들 때에는 숨겨져 잘 안 보이는 뒤쪽도 잘 다듬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한다. “아버지는 일을 제대로 하는 걸 철칙으로 여기셨지요.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신경 쓰면서 말이에요.”
잡스는 열정적인 장인 정신의 특징은 숨어 있는 부분까지도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철저를 기하는 것임을 아버지에게서 배웠다. 이 철학의 가장 극단적이고 두드러진 실천 사례는 잡스가 칩과 다른 부품 들을 부착하고 매킨토시 내부 깊숙한 곳에 들어갈 인쇄 회로 기판을 철저하게 검사한 경우였다. 어떠한 소비자도 그걸 볼 일이 없었다. 하지만 잡스는 인쇄 회로 기판을 심미학적인 토대로 비평하기 시작했다. “저 부분 정말 예쁘네. 하지만 메모리칩들을 좀 봐. 너무 추하잖아. 선들이 너무 달라붙었어.” (중략) “최대한 아름답게 만들어야 해. 박스 안에 들어 있다 하더라도 말이야. 훌륭한 목수는 아무도 보지 않는다고 장롱 뒤쪽에 저급한 나무를 쓰지 않아.” 몇 년 후 매킨토시가 출시되고 나서 한 어느 인터뷰에서, 잡스는 아버지에게서 배운 교훈을 다시 한 번 언급했다. “아름다운 서랍장을 만드는 목수는 서랍장 뒤쪽이 벽을 향한다고, 그래서 아무도 보지 못한다고 싸구려 합판을 사용하지 않아요. 목수 자신은 알기 때문에 뒤쪽에도 아름다운 나무를 써야 하지요. 밤에 잠을 제대로 자려면 아름다움과 품위를 끝까지 추구해야 합니다.”
◇극단적 미니멀리즘을 추구하는 잡스의 디자인 철학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잡스는 아타리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그는 재미난 설계와 매력적인 상호작용을 창출하는 칩들을 추가함으로써 몇몇 게임이 개선되도록 도왔다. 자기 자신의 규칙으로만 승부하려는 부시넬의 행태 역시 잡스에게 전염되었다. 더욱이 잡스는 아타리 게임들의 단순함이 지니는 가치를 직관적으로 알아보았다. 그 게임들에는 설명서가 필요 없었다. 마약에 취한 대학 1학년짜리조차 쉽게 사용법을 알 수 있었다. 아타리에서 나온 ‘스타 트렉’ 게임의 유일한 사용 설명문은 “1) 25센트 동전을 넣으시오. 2) 클링온(동명의 미국 드라마 스타트렉에도 등장하는 외계 종족)들을 피하시오.”였다.
잡스는 아이클러 주택(잡스가 어린 시절을 보낸 동네의 주택)에 대한 호감과 존경으로 인해 깔끔한 디자인의 제품을 만들어 대중 시장에 공급하고자 하는 열정이 생겨났다고 말한다. “멋진 디자인과 심플한 기능을 저렴한 가격과 결합하는 일을 저는 무척 좋아합니다.” 아이클러 주택의 깔끔하고 우아한 디자인을 가리키며 그가 말했다. “그것이 바로 애플 컴퓨터가 애초부터 가졌던 비전이었지요. 첫 번째 맥 컴퓨터로 시도했던 것도 바로 그것이었고, 아이팟으로 시도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을 바꿀 위대한 제품에 대한 끝없는 열정과 탁월한 동기 부여 능력을 보여 주는 일화들
“그는 제품에 대한 열정이 강박에 가까울 만큼 남달랐습니다. 완벽한 제품을 만들려는 열정 말입니다.” 반면 마이크 스콧은 완벽을 추구하기보다는 실용주의를 우선시하는 타입이었다. 두 사람은 애플 II의 케이스 디자인을 놓고도 충돌했다. 플라스틱 케이스 색깔을 결정하기 위해 애플이 선택했던 색상 전문 업체 팬톤 사는 2000가지 종류의 베이지색을 갖추고 있었다. 스콧은 이렇게 회상한다. “세상에, 스티브는 그중에서도 마음에 드는 게 없다고 했어요. 좀 더 다른 베이지색을 원했어요. 결국 제가 나서서 설득해야 했지요.” 케이스 디자인의 세부적인 부분을 조율할 때도 잡스는 모서리 부분을 어느 정도로 둥글게 만들어야 할지를 놓고 며칠 동안 고민했다.
“스티브는 큰 그림을 보며 동기를 부여하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 결과 매킨토시 개발 팀은 단지 수익을 올리는 제품이 아닌 훌륭한 제품을 만들고자 하는 잡스의 열정을 공유하게 되었다. “잡스는 스스로를 예술가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설계 팀에도 그런 식으로 생각하라고 독려했어요.” 허츠펠드는 말한다. “경쟁에서 이기거나 돈을 많이 버는 게 목표였던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가능한 한 가장 위대한 일을 하는 것, 혹은 거기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는 것이 목표였어요.” 잡스는 심지어 팀을 데리고 루이스 티파니의 유리 제품 전시회를 보러 맨해튼의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을 찾은 적도 있었다. 대량생산할 수 있는 위대한 예술품을 창출하는 티파니의 예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일정에 따른 개발 완료일을 언급하며 잡스는 팀원들에게 “잘못된 제품을 출시하느니 일정을 어기는 게 낫다.”라고 말했다. 어느 정도의 트레이드오프는 수용하는 다른 성향의 프로젝트 매니저였다면 특정 날짜를 기한으로 못 박고 이후로는 어떤 수정이든 허용치 않으려 했을 터였다. 하지만 잡스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다른 신념을 지니고 있었다. “출시 전까지는 완성된 게 아니다.”
매킨토시 출시 및 마케팅 계획을 세우는 과정에서 스컬리는 맥 가격을 500달러 더 올릴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마케팅 비용이 생산비 못지않게 들어갈 것이므로 그 비용도 제품 가격에 반영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잡스는 강하게 반대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러면 우리가 지향하던 신념이 완전히 깨집니다. 나는 맥으로 이윤을 짜내고 싶은 게 아니라 혁명적인 제품을 선보이고 싶은 거라고요.”
매킨토시의 박스와 패키지 전체에 컬러 디자인을 적용했고, 거듭 개선하려고 노력했다. “세상에 그걸 50번이나 수정하라고 시켰어요.” 조애나 호프먼과 결혼한 맥 팀의 일원 알랭 로스만이 회상한다. “소비자가 열자마자 쓰레기통에 버릴 박스나 패키지의 외양에 집착에 가까운 정성을 기울였다니까요.” 로스만이 볼 때 이는 균형이 맞지 않는 행태였다. 메모리칩에는 돈을 절약하려고 그렇게 애쓰면서 값비싼 포장에 돈을 낭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잡스는 매킨토시를 굉장한 컴퓨터로 만들고 겉모습도 그렇게 보이게 하려면 디테일은 필수라고 생각했다.
“위대한 예술품은 사람들의 취향을 따라가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확장시키지.” 그가 앳킨슨에게 말했다. 그는 벤츠의 디자인에도 감탄했다. “그 세월 동안 선은 더 부드러워졌지만 디테일은 오히려 부각되었지요.” 주차장을 거닐면서 그가 말했다. “매킨토시도 그렇게 만들어야 해요.”
“모서리가 둥근 직사각형은 어디서나 찾아볼 수 있소!” 잡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열을 내며 말했다. “이 방 안을 둘러보라고!” 그는 화이트보드와 테이블 위, 그리고 모서리가 둥근 다른 직사각형의 물체들을 가리켰다. “그리고 바깥을 내다보면 더 있소. 거의 보는 곳마다 다 있다고!” 그는 앳킨슨을 이끌고 산책을 하며 자동차 창문과 게시판, 거리의 표지판 등을 보여 주었다. “세 블록 왔는데 열일곱 가지 예를 찾았어요.” 잡스가 말한다. “그가 완전히 납득할 때까지 여기저기에서 다 찾아냈지요.” “그가 마침내 주차 금지 표지판에 다가갔을 때, 제가 이렇게 말했어요. ‘네, 회장님 말씀이 옳아요. 제가 졌습니다. 모서리가 둥근 직사각형을 기본으로 삼을 필요가 있습니다!’” 허츠펠드는 당시를 이렇게 기억한다. “빌은 다음 날 오후 만면에 웃음을 띠고 텍사코 타워스로 돌아왔어요. 그의 데모는 이제 모서리가 둥근 아름다운 직사각형들을 굉장한 속도로 그릴 수 있게 되었지요.” 리사와 맥, 그리고 이후 거의 모든 컴퓨터의 대화 상자와 창 들은 둥근 모서리를 가지게 되었다.
잡스는 창과 문서, 화면 등의 상단에 위치한 제목 표시 줄에도 똑같은 관심을 쏟아부었다. 그것들의 디자인에 대해 고뇌하면서 앳킨슨과 케어에게 수없이 반복해서 수정하게 만들었다. 잡스는 리사에 적용했던 제목 표시 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너무 까맣고 거칠다는 게 이유였다. 맥 컴퓨터에서는 좀 더 부드러운 느낌을 살리고 가는 세로줄 무늬를 추가하길 원했다. 앳킨슨은 회상한다. “그가 만족할 때까지 아마 스무 개가 넘는 제목 표시 줄 디자인을 만들었을 거예요.” 어느 시점에서 케어와 앳킨슨은 더 중요한 일이 있는데 잡스 때문에 제목 표시 줄에 사소한 수정을 가하느라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한다고 불평했다. 그러자 잡스가 폭발했다. “그걸 매일 쳐다봐야 한다는 것은 생각해 보지 못했소?” 그가 소리 질렀다. “사소한 게 아니야, 제대로 해야 하는 거라고.”
루빈스타인은 아이브의 미적 욕구와 갖가지 디자인 아이디어를 접할 때마다 현실적인 비용 문제를 제기하곤 했다. 잡스는 이렇게 말했다. “견본을 가지고 엔지니어에게 갔더니 그걸 만들 수 없는 이유 서른여덟 가지를 내놓더군요. 그래서 제가 말했지요. ‘아니, 아니, 우리는 이걸 해야 해.’ 그들이 물었습니다. ‘글쎄, 왜요?’ 제가 대답했지요. ‘내가 CEO니까. 나는 이걸 충분히 할 수 있다고 생각해.’ 결국 그들은 마지못해 제작에 임했지요.”
“나는 IBM이나 마이크로소프트 같은 기업들이 쇠퇴하는 이유에 대해 나 나름의 이론을 갖고 있다. 이러한 기업은 특정 분야에서 뛰어난 재능을 발휘해 혁신을 꾀하고 독점 기업 또는 그에 가까운 기업이 되는데, 그러고 나면 제품의 질을 경시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훌륭한 세일즈맨들에게 가치를 두기 시작한다. 수익의 바늘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제품 엔지니어나 디자이너가 아니라 그들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결국에는 세일즈맨들이 회사를 운영하게 되는 것이다. IBM의 존 에이커스는 똑똑하고 언변이 뛰어난 환상적인 세일즈맨이었지만 제품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다. 제록스에서도 이와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세일즈맨들이 회사를 운영하면 제품을 만드는 사람들은 다소 경시되기 시작하고 그렇게 되면 그중 상당수가 흥미를 잃는다. 나의 실수로 스컬리가 영입되었을 때 애플에도 그런 일이 일어났고 발머가 마이크로소프트를 맡았을 때도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애플은 운이 좋아서 재기했지만 마이크로소프트는 발머가 운영하는 한 절대 변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스티브 잡스는 어떤 사람을 채용했으며 애플이 어떤 조직이 되기를 바랐는가?
잡스는 특정 부서에 지원한 면접자들을 해당 부서의 관리자가 아닌, 회사 수뇌부(쿡, 테버니언, 실러, 루빈스타인, 아이브 등)와 만나게 했다. “그런 다음 우리끼리 따로 모여서 그들이 적당한지 어떤지 이야기를 나눴지요.” 잡스의 말이다. 그의 목표는 “머저리가 급증하지 않도록”, 즉 회사에 이류 인재가 넘치지 않도록 경계하는 것이었다.
“삶에서 만나는 것들은 대부분 최고와 평범함 사이의 차이가 30퍼센트 정도입니다. 최고의 항공 여행, 최고의 식사, 이런 것들은 평범한 항공 여행이나 식사에 비해 30퍼센트가량 더 낫다는 이야깁니다. 하지만 저는 워즈에게서 평범한 엔지니어보다 50배나 뛰어난 엔지니어를 봤습니다. 그는 자신의 머릿속에서 회의를 열 수도 있는 인물이었지요. 맥 팀은 그와 같은 완전한 팀, 즉 A급 선수들로 이루어진 팀을 구축하기 위한 시도였어요. 사람들은 그들이 서로 사이가 안 좋을 것이며, 함께 일하는 걸 싫어할 거라고 말했지요. 하지만 저는 A급 선수들은 A급 선수들과 함께 일하는 걸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그들은 단지 C급 선수들과 일하는 걸 싫어할 뿐이지요.”
디지털 세상에 살고 있음에도, 혹은 어쩌면 그것의 고립 가능성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에 잡스는 직접적인 만남을 열렬히 신봉했다. 그는 말했다. “이런 네트워크 시대에는 이메일이나 아이챗을 통해 아이디어들을 발전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고 싶겠지요. 그건 말도 안 됩니다. 창의성은 우연한 만남이나 무작위적인 논의에서 나오는 겁니다. 누군가를 우연히 만나 일의 진행 상황을 묻고 진심 어린 반응을 보여 주다 보면 곧 온갖 종류의 아이디어들로 요리를 하게 되지요.”
그래서 그는 픽사 건물이 우연한 만남과 임의적인 협력을 독려하는 방식으로 설계되도록 했다. “건물이 그런 것을 독려하지 않으면 뜻밖의 발견으로 야기되는 혁신과 마법을 상당 부분 잃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들이 사무실에서 나와,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서로 만날 일이 없었을 사람들과 중앙 안뜰에서 섞이도록 건물을 설계했지요.”
(잡스에게) 뭉개지지 않은 사람들은 결국 더 강해졌다. 그들은 실제로 일도 더 잘하게 되었다. 그러한 성과는 잡스에 대한 두려움과 그를 기쁘게 해 주고 싶은 열망, 그리고 자신에게 기대되는 바에 대한 인식에서 비롯했다. 호프먼이 말한다. “그의 행동 방식은 사람들을 감정적으로 지치게 만들었지만, 견뎌 내기만 하면 아주 좋은 효과를 발휘하기도 했어요.” 가끔은 반대 의견을 제시하고도 살아남을 뿐 아니라 성공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게 항상 통했던 것은 아니다. 래스킨이 그러한 전략을 시도하고 한동안은 성공한 듯 보였지만 결국 뭉개져 버린 것이 좋은 예다. 하지만 누군가가 확신을 갖고 침착하게 옳은 말을 하는 경우, 그래서 잡스가 보기에 그가 일을 제대로 알고 하는 것 같다는 판단이 서는 경우, 잡스는 그를 존중해 주었다. 그의 개인 생활과 회사 생활 모두를 돌아보면 그와 친한 핵심 인물들 대부분이 아부에 능한 사람이 아닌 강한 심성의 소유자임을 알 수 있다.
◇스티브 잡스는 프레젠테이션을 어떻게 준비했는가?
잡스의 제품 출시 쇼는 정교하게 구성되었다. 그는 청바지와 터틀넥을 입고 생수병을 든 채 무대를 느긋하게 거닐었다. 객석은 지지자들로 가득했다. 행사장 분위기는 기업의 제품 발표회라기보다는 어떤 종교의 부흥회와 비슷했다. 기자들 자리는 객석 중앙에 마련되었다. 잡스는 슬라이드에 들어갈 내용과 연설의 요점을 직접 작성하고 수정한 다음, 그것을 친구들에게 보여 주고 동료들과 함께 심사숙고하며 개선해 나갔다. “그는 각각의 슬라이드를 예닐곱 번씩 수정해요. 프레젠테이션 전날 밤늦게까지 슬라이드를 점검하는 동안 저도 그의 곁에 함께 있곤 한답니다.” 잡스의 아내 로렌 파월의 말이다. 잡스는 그녀에게 슬라이드 세 가지 버전을 보여 주고 어느 것이 가장 나은지 묻곤 했다. “사소한 부분까지 심하게 집착하는 편이에요. 발표 예행연습을 한 차례 한 다음, 한두 가지 단어를 바꾸고 처음부터 다시 예행연습을 한다니까요.”
◇애플의 브레인스토밍 휴가 ‘톱 100’
잡스는 1년에 한 차례씩 가장 소중한 직원 100명을 뽑아 휴양지로 데려간다. 그는 그들을 ‘톱 100’이라 부른다. 선발 기준은 간단하다. 새로운 회사로 떠난다고 가정했을 때 ‘구명보트’에 꼭 태우고 싶은 사람들만 가려내는 것이다. 행사가 막바지에 다다르면 잡스는 화이트보드 앞에 서서(그는 화이트보드를 무척 좋아한다. 분위기를 완벽하게 장악하고 사람들을 집중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묻는다. “우리가 앞으로 해야 할 일 열 가지는 무엇일까요” 직원들은 리스트에 자신의 아이디어를 올리고 싶어서 경쟁적으로 제안을 내놓는다. 잡스는 제시된 의견을 받아 적은 다음, 형편없다고 생각되는 것은 줄을 그어 지운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고 나면 화이트보드에는 열 개의 아이디어가 남는다. 잡스는 열 개 가운데 아래쪽 일곱 개를 지운 뒤 선언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이 세 가지뿐입니다.”
◇스티브 잡스가 마지막으로 구상했던 사업은?
잡스는 기존에 나온 것들 이외에도 현실에서 구현하고 싶은 다른 아이디어를 많이 가지고 있었다. 아이패드용 커리큘럼 교재와 전자 교과서를 만들어 교과서 산업을 와해하고, 책가방을 메고 다니느라 척추가 휘는 학생들을 구하고 싶었다. 그는 또한 원조 매킨토시 팀 시절의 팀원이었던 빌 앳킨슨과 협력하여, 아이폰으로 광도가 좋지 않은 곳에서 촬영해도 픽셀 작업을 통해 사진이 잘 나오게 하는 새로운 디지털 기술을 고안하고 있었다. 그리고 컴퓨터와 뮤직 플레이어, 휴대전화에서 달성한 것을 텔레비전에도 적용하고 싶었다. 바로 텔레비전을 단순하고 우아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는 내게 말했다. “아주 손쉽게 사용할 수 있는 통합적인 텔레비전을 만들고 싶습니다. 모든 기기들 그리고 아이클라우드와도 막힘없이 호환되는 그런 텔레비전 말이지요.” 그렇게 되면 사용자들은 DVD 플레이어와 케이블 채널을 조작하려고 복잡한 리모컨과 씨름할 필요가 없게 된다는 것이었다.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단순한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갖추는 겁니다. 드디어 그걸 구현할 방법을 찾아냈습니다.”
◇스티브 잡스가 청년들에게 남기고 싶었던 말
잡스는 새로운 세대의 학생들에 대해 아쉬운 점을 말하곤 했다. 잡스에게는 그들이 자기 세대보다 물질주의적이고 경력이나 취업에만 신경 쓰는 것처럼 보였다. “제가 학교를 다닌 시절은 1960년대를 막 지난 직후였고, 지금처럼 현실적인 목표 의식을 가진 세대가 등장하기 전이었지요. 요즘 학생들은 이상을 추구하려는 생각을 하질 않아요. 경영 수업만 열심히 받지, 이 시대에 고민해 볼 필요가 있는 철학적인 문제들에 시간을 쏟고 싶어 하지 않지요.” 잡스 자신의 세대는 달랐다고 말한다. “하지만 1960년대를 휩쓸었던 이상주의 바람은 아직도 우리 마음속에 있습니다. 저와 같은 시대를 산 사람들 대부분의 마음속에는 그 바람이 언제까지고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잡스가 말년에 아내에게 남긴 사랑 고백
잡스는 친구가 찍어 준 결혼식 사진들을 찾아 두꺼운 종이 판지에 크게 출력해 우아한 상자에 넣었다. 그는 자신의 아이폰을 뒤져 그 상자에 넣으려고 쓴 편지를 찾아 소리 내어 읽어 주었다.
20년 전에 우리는 서로를 잘 알지 못했지요. 우린 그저 직감에 끌렸어요. 당신은 나를 황홀하게 했어요. 아와니에서 결혼식을 올릴 때 눈이 내렸지요. 수년이 지나 아이들이 태어났고, 행복한 적도 있었고 힘들었던 적도 있었지만 나빴던 적은 없었어요. 우리의 사랑과 존경은 점점 더 커졌지요. 많은 것들을 함께하고 이렇게 20년 전에 시작한 그곳으로 돌아왔네요. 좀 더 늙고 좀 더 현명해지고 얼굴과 가슴에 주름도 늘었지요. 이제 우리는 인생의 기쁨과 고통, 비밀, 경이로움을 많이 알게 되었고, 그리고 여전히 이렇게 서로를 마주하고 있어요. 나는 황홀하지 않은 적이 한 번도 없답니다.
낭송을 끝마칠 무렵 그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오바마 대통령에게 한 조언
잡스는 주저 없이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대통령께선 지금 단임 대통령으로 끝날 가능성이 높습니다.” 잡스는 처음부터 오바마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러지 않기 위해서는 오바마 행정부가 더 기업 친화적으로 변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중국에 공장을 세우는 일은 매우 쉽지만 요즘 미국에 공장을 세우는 것은 여러 가지 규제와 불필요한 비용 때문에 거의 불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잡스는 또한 미국의 교육 시스템이 속수무책으로 낡았으며 교원 노조 때문에 절름발이가 되었다고 공격했다. 교원 노조가 해체되기 전까지는 교육 개혁의 희망이 거의 없다, 교사들은 공장 조립라인의 노동자처럼 대우받을 것이 아니라 전문직으로 대우를 받아야 한다, 학교장이 능력에 따라 교사를 고용하고 해고할 수 있어야 한다, 학교는 적어도 오후 6시까지는 문을 닫지 말아야 하며 1년에 11개월은 수업을 해야 한다, 미국의 교실에서 여전히 교사가 칠판 앞에 서서 교과서를 사용하는 방식으로 수업이 이뤄진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모든 책과 학습 교재와 평가는 디지털을 이용한 쌍방향의 학생별 맞춤 형태가 되어야 하며 실시간 피드백도 제공되어야 한다,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스티브 잡스가 말년에 자신을 찾아온 구글의 CEO 레리 페이지에게 해 준 조언
구글이 어떤 회사로 성장하길 바라는지 파악해라, 구글은 이제 전 세계 어디에든 존재한다, 당신이 가장 집중하고 싶은 다섯 가지 제품은 무엇인가? 나머지는 모두 제거해라, 그렇지 않으면 구글은 쇠약해질 것이다, 마이크로소프트처럼 되고 말 것이다, 적당할 뿐 훌륭하지는 않은 제품들을 생산하게 될 것이다….
◇빌 게이츠와의 마지막 만남
게이츠는 다시 일정을 잡아 어느 이른 오후 차를 몰고 잡스의 집으로 갔다. 뒷마당 대문을 통과해 열려 있는 주방 문으로 들어가자, 이브가 식탁에 앉아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가 물었다.
“아버지 계시니?” 이브는 거실에 있는 아버지를 가리켰다.
그들은 세 시간이 넘도록 함께 지난날을 돌아보았다. “노인네들처럼 업계를 돌아보았습니다. 빌은 어느 때보다도 즐거워하더군요. 그가 참 건강해 보인다는 생각이 내내 들었지요.” 잡스의 회상이다. 게이츠 역시 잡스가 심하게 여위긴 했지만 예상했던 것보다 활력이 넘친다고 느꼈다. 잡스는 자신의 건강 문제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얘기했고 적어도 그날만큼은 낙관적인 태도를 보였다. 연속해서 표적 약물 치료를 받는 것은 “물 위에 떠 있는 커다란 수련 잎들을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암보다 한 발짝 앞서려고 노력하는 것과 같다고 게이츠에게 말했다.
잡스는 교육에 대해서 몇 가지 질문을 던졌고, 게이츠는 자신이 생각하는 미래의 학교를 묘사했다. 학생들은 혼자서 강의 동영상을 보며 수업을 받고 교실 수업은 토론과 문제 해결을 위해 활용하게 될 것이라고 말이다. 그들은 아직까지는 컴퓨터가 학교에 미친 영향이 놀라울 정도로 미미하다는 데(즉 미디어와 의료계, 법조계 등 사회의 다른 영역에 미친 영향에 비하면 크게 뒤떨어지는 수준이라는 데) 동의했다. 그것을 바꾸기 위해서는 컴퓨터와 모바일 기기 들이 개인 맞춤 교육을 제공하고 피드백을 통해 동기를 부여하는 데 주력하도록 바뀌어야 한다고 게이츠는 말했다.
또한 두 사람은 좋은 여자와 결혼해서 착한 자녀들을 두었으니 자신들은 행운아라며 고개를 끄덕이고 가족이 주는 기쁨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게이츠는 이렇게 회상했다. “그가 로렌을 만나고 로렌이 그를 반쯤 미친 상태로 놔뒀다는 점, 내가 멜린다를 만나고 멜린다가 나를 반쯤 미친 상태로 놔뒀다는 점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얘기하며 웃음을 터뜨렸지요. 그리고 우리의 자녀로 사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와 관련된 스트레스를 아이들에게서 덜어 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얘기했어요. 아주 개인적인 얘기들이었지요.” 그러다 게이츠의 딸 제니퍼와 마장마술 쇼에 함께 갔던 이브가 거실로 들어오자 게이츠는 이브에게 점프 연습은 잘되는지 물었다.
◇아이패드에 삼성에서 제조한 칩이 들어가게 된 사연
매킨토시 컴퓨터들은 이제 인텔칩을 사용하고 있었으므로 처음에 잡스는 아이패드에 인텔이 개발 중인 낮은 전압의 아톰 칩을 사용하려 했다. 인텔의 CEO 폴 오텔리니는 특정 설계를 공동으로 진행하자며 고집을 부렸고, 잡스도 그를 믿고 싶었다. 그의 회사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프로세서를 만들고 있었다. 그러나 인텔은 배터리 수명을 관리해야 하는 기기보다는 벽에 플러그를 꽂아 쓰는 기기를 위한 프로세서를 제작하는 데 익숙했다. 그래서 토니 파델은 보다 단순하고 전력을 적게 사용하는 ARM 아키텍처 기반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애플은 초창기에 ARM과 파트너십을 맺었으며, 원조 아이폰에도 ARM 아키텍처를 사용하는 칩들이 들어갔다. 파델은 다른 엔지니어들의 지지를 끌어모았고 잡스와 맞서 결국 그의 마음을 돌리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안 됩니다. 그건 아닙니다!” 어느 날 회의에서 잡스가 적절한 모바일 칩 제작은 인텔에 맡기는 게 최선이라고 주장하자 파델은 이렇게 소리쳤다. 파델은 심지어 애플 배지를 테이블에 놓고 사직하겠다고 협박했다.
결국 잡스는 손을 들었다. “알겠네. 최고의 부하들을 거스를 순 없지.” 그러고는 아예 반대 방향의 극단으로 내달렸다. 애플은 ARM 아키텍처의 라이선스를 얻는 한편, 팰러앨토에 있는 사원 150명의 마이크로프로세서 설계 회사 P. A. 세미를 인수하고 그들에게 A4라는 맞춤형 SoC (system-on-a-chip: 시스템 전체를 담는 칩)를 개발하게 했다. A4는 ARM 아키텍처를 기반으로 한국의 삼성에서 제조되었다. 잡스는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고성능을 위해서라면 인텔이 최고지요. 그들은 가장 빠른 칩을 만들어요. 전력과 비용을 따지지만 않는다면 말이지요. 하지만 그들은 하나의 칩에 프로세서만 담아서 다른 부품들이 많이 필요해요. 우리 A4는 칩 안에 프로세서와 그래픽, 모바일 운영체제, 메모리 컨트롤이 모두 들어가 있지요. 인텔을 도우려고 해 봤지만 그들은 남의 말을 경청하는 스타일이 아니에요. 우린 수년 동안 그들의 그래픽이 형편없다고 얘기해 왔습니다. 분기마다 나와 우리의 톱 3 경영진 그리고 폴 오텔리니가 함께 미팅을 하지요. 처음에는 함께 멋진 것들을 해냈어요. 그들은 미래의 아이폰용 칩을 개발하는 이 대단한 합동 프로젝트를 하고 싶어 했지요. 하지만 우리는 두 가지 이유에서 그들과 함께할 수 없었어요. 하나는 그들이 정말 느리다는 겁니다. 무슨 증기선 같아요. 유동성이 떨어져요. 우린 빨리 나아가는 데 익숙합니다. 두 번째 이유는 그들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고 싶진 않다는 점이에요. 그렇게 다 가르쳐 주고 나면 그들이 우리 경쟁자들에게 그것을 팔아먹을 수도 있잖아요.
◇아이맥의 플라스틱 케이스 생산 과정
심지어 플라스틱 껍데기의 단순성 자체만도 엄청나게 복잡한 과정을 수반했다. 아이브의 팀은 애플의 한국 제조 업체와 협력하여 케이스 생산 공정에 완벽을 기했다. 또한 매력적인 반투명 색깔을 만들고자 젤리 과자 공장까지 찾아다니며 연구를 거듭했다. 케이스의 가격은 개당 60달러로, 보통 컴퓨터 케이스에 비해 세 배나 비쌌다. 다른 회사였으면 반투명 케이스가 추가 비용을 정당화할 만큼 매출을 늘려 줄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 프레젠테이션과 연구를 수차례 실시했을 것이다. 하지만 잡스는 그와 같은 분석을 요구하지 않았다.
한국에서는 안진환씨의 번역으로 민음사에서 나왔다. 944쪽, 2만5000원